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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국의 승리스토리

훈민정음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훈민정음

Contents

1. 조선 세종 때 제작된 책 및 그에 실린 문자 체계
1.1. 서문
1.2. 관련 서적
1.2.1. 언해본
1.2.2. 실록본
1.2.3. 해례본
1.2.3.1. 어떤 책인가?
1.2.3.2. 해례본의 구성
1.2.3.3. 간송본
1.2.3.3.1. 간송본에 얽힌 흑역사
1.2.3.3.2. 간송 전형필 선생, 그 이후
1.2.3.4. 상주본
1.2.3.4.1. 오리무중인 행방
1.2.3.5. 제3의 판본 일부 발견
1.3. 조선시대 훈민정음의 취급에 관하여
1.3.1. 대왕님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신 이유
1.3.2. 왕실의 입장에서 훈민정음
1.3.3.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
1.3.4. 숙종?
1.3.5.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 표현? - 언문과 암글(암클)
1.3.5.1. 언문
1.3.5.2. 암글(암클)
1.4. 관련 링크
1.5. 대중매체에서의 훈민정음
2. 삼성전자의 워드프로세서

1. 조선 세종 때 제작된 책 및 그에 실린 문     자 체계

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최초의 한글 패치

창제일은 1443년 12월. 다만 책이 발간된 1446년 9월을 기준으로 하여 오늘날의 한글날이 만들어졌다.
  • 이 책을 통해 공포된 문자 체계에 대해서는 한글 문서를 참고할 것. 이 문서에서는 '훈민정음'이라는 책과 문자 체계가 아직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조선시대에서의 취급에 대해서만 다룬다.

1.1. 서문[1]

  • 함초롬체 LVT(아래아 한글 항목 참고)가 설치되어 있으면 제대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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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ᇰᅌᅥᆼ져ᇰᅙᅳᆷ
세 종 어 제 훈 민 정 음


나랏말ᄊᆞ미中듀ᇰ에달아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그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이ᄅᆞᆯ為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언해> 서문



조ᇰᅌᅥᆼ져ᇰᅙᅳᆷ
세 종 어 제 훈 민 정 음

나랏말ᄊᆞ미中듀ᇰ에달아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그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이ᄅᆞᆯ為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언해> 서문 -

  • 언해본의 나머지 원문과 그 현대어 해석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또한 성조 3 항목에서 훈민정음 언해 서문의 낭독법을 들을 수 있다. [2][3]
  • 당시에 중국의 국호는 '명'이었고 중국은 없었던 표현이었다고 하는 사이비 역사 측의 트롤링주장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중국은 중국이었다.[4] 증거? 이 문서의 이미지. 훈민정음 언해본 이미지를 보면 중국은 황제가 계신 나라, 조선에서는 흔히 하는 말로 강남[5]을 말한다고 작은 글씨로 분명히 부연되어 있다(異乎中國).

1.2. 관련 서적

1.2.1. 언해본


세조 때 발간된 '월인석보'[6]의 권두에 세종의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한문(+현토)/한글 번역의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이것이 언해본이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나랏말쌈이…'도 여기서 나왔다. 이를 훈민정음 언해본이라고 부른다.

해례본보단 늦더라도 가까운 시기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이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붙어있는 것이다. 

이외에 언해본은 2종(박승빈본, 일본 국내청 소장본)이 더 현전하지만 내용의 차이는 없다.

이 언해본은 2012년 10월 9일 한글날에 네이버에서 디지타이징 버전으로 무료 공개했다. 보러 가기

1.2.2. 실록본

훈민정음은 세종실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해례와 정인지 서문을 제외한 세종의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 이를 실록본이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1.2.3. 해례본

unesco-memoryoftheworld.gif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이름훈민정음 해례본
Hunminjeongum Manuscript / 
Hunminjeongum
국가·소장대한민국 서울 간송미술관
등재유형기록유산
등재연도1997년
제작시기1443년
한글 훈민정음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의 제목. 국보 제70호이며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해례본 책이 등재된 것이지, 절대 문자 체계인 '한글' 그 자체가 유네스코에 오른 게 아니다!

1.2.3.1. 어떤 책인가?

1940년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된,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책. 말하자면 한글의 설계도가 실려있는 책이다. 한글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 밝혀져 있는 책은 이것이 유일하며, 언해본에는 그런 내용은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억측이 존재했다. 심지어는 창문살을 보고 본따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까지 있었다. 이 이야기 자체는 당시부터 있어왔으며 이론의 하나로 소개한 것은 독일 사람인데, 일본인들도 한국 고유의 창살 문양에서 유래되어 창제되었다는 설을 가르쳤다. 해례본 발견 후에도 일제강점기에 공부한 사람 중에서는 이것이 맞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70년대 발간된 어린이용 교양서적에도 이런 주장이 실렸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폄하를 겪던 와중에, 해례본의 발견을 통해 엄청나게 독창적이고, 매우 높은 수준의 언어학, 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이 한글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인해 한글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들이 확인 되고 알려지긴 했는데, 사실 그 내용이 꽤 어려워서 아직도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특히 모음자와 관련된 부분.

2014년 현재 알려져 있는 판본은 간송본과 상주본 단 둘 뿐이다. 그나마도 소재가 알려져 있는 것은 간송본 뿐이다.

다행히 간송본을 토대로 영인본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열람이나 유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2014년에 제3의 판본...의 파편(...)이 익선관 속에서 발견되었다. 아래 항목 참고.

1.2.3.2. 해례본의 구성

그리고 한자로 쓰여 있다. 흔히 말하는 '나랏말싸미…'는 언해본의 서문. 당대의 문자 언어는 한문이었고, 새로 만든 문자를 설명하는 언어가 한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로 발견된 훈민정음은 맨 앞 부분 두 장이 고의적으로 찢긴 상태[8]였는데, 학자들은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 책을 감추기 위해서 표지를 뜯어 내고 다른 표지를 입혔던 흔적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1.2.3.3. 간송본

초간본, 즉 원본이자 최초로 발견된 해례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보관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대에 발견된 뒤로 유일하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이름보단 훈민정음 원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상주에서 두번째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구별을 위해 소유자의 호를 따서 간송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이 판본 역시 세종대왕 생전에 나온 것으로 보긴 좀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세종'이라는 묘호는 세종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 그래도 현재 남아 있는 판본 중에서 간행시기가 가장 이른 판본이고 내용상 원본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어학계에서는 이를 원본이라 하지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정확하게 부른다.
1.2.3.3.1. 간송본에 얽힌 흑역사
이 간송본은 일제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이용준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 

원래 광산 김씨 문중의 가보로, 이용준의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인 긍구당 서고에 이 해례본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 이것은 가문의 선조가 여진 토벌의 공로로 세종이 직접 하사한 것[9]이었고, 이용준은 이걸 발견하고 김태준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당연히 김태준은 깜짝 놀라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했다. 

이용준은 잘 보관할 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말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을 떠 올렸다.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해례본 이야기를 했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원을 찾아와 1천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뤘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사례비가 3억원? 

당시 전형필 선생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 

그런데...

앞서 해례본의 앞쪽 두 장이 찢겨나갔다고 언급했는데, 2000년대의 연구[10]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관련되어 있던 인물들이 소유주 몰래 팔아먹기 위해(!) 일부러 찢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은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고를 열람하다 해례본을 훔쳐갔던 것. 이용준이 해례본과 매월당집을 여기서 훔쳤는데 표지에 광산 김씨 가보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어 이를 찢어내어 팔았던 것이 표지 실종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에 있는 매월당집이 마찬가지로 앞 두 장이 인위적으로 찢겨져 있다. 나중에 이를 들키고 장인에게 혼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있다.[11]

여담이지만, 그 이후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판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써 경성 콤그룹의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으며,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1.2.3.3.2. 간송 전형필 선생, 그 이후
전형필 선생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들켰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길 정도로 보존을 철저히 했다.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온 것은 그런 간송 선생의 노력 덕이라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1956년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다. 

전형필 선생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하게 내놓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대인배.

그 이후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보관되고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는 날이 적어 직접 보기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원본 사진을 찍어서 만든 영인본이 따로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 말도록. 보존을 위해서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있다. 

이 귀한 책을 화끈하게 지르고(!)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신 간송 전형필 선생께 감사하자.

참고로 2014년 3월 말부터 6월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 전시회에 드디어 원본이 출동하신다고 한다.

1.2.3.4. 상주본

오랜 세월 해례본은 단 한 권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왔지만, 2008년 7월에 경북 상주에서 간송미술관의 간본과 동일한 판본이 발견되었다. 

경북 상주시에 사는 고서 수집가 배 모씨가 집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다며 이를 일부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지를 따서 이를 상주본이라 부른다.

상주본은 훈민정음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는 간송본보다 좋고 간송본에는 없는 표기, 소리 등에 대한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여겨졌다. 

굳이 가격으로 따진다면 1조원 이상의 가치가 될 걸로 추정된다고 한다.
1.2.3.4.1. 오리무중인 행방
그러나 이 상주본은 인간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상주의 골동품상 조 모씨는 원래 자신의 가게에 있던 물건인데, 어느새 상주의 골동품 수집가 배 모씨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며 배씨가 이를 훔쳐간 것이라 주장하면서 소유권 분쟁이 시작했다.

이는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고, 2012년 대법원은 배씨가 이를 절도한 것을 인정하여 소유권이 조씨에게 있다고 최종 판결했다. 

이에 조씨는 해례본을 문화재청에 기부하기로 하였고, 2012년 5월 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증식까지 가졌다. 

물론 실물은 배씨가 내 놓지 않고 있어 영인본만으로 기증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씨는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그런데 검찰 수사 결과 화끈한 반전이 나왔다. 상주본의 정체가 원래는 안동의 광흥사 나한상 안에 있던 불복장[12] 유물이었던 것. 

1999년경 문화재 전문 절도범 서 모씨가 털어가서 골동품상 조씨에게 팔아치운, 결국 장물이었던 것이다. 

배씨는 상주본을 낱장으로 뜯어서 몰래 숨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배째라 버티다 문화재보호법 위반(낱장으로 뜯었으니 일단 문화재 훼손에 해당된다)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문제는 그 난리통에 상주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이다. 

배 씨가 법정 다툼을 벌이는 사이 검경이 배 씨의 집을 압수수색까지했지만 행방을 찾지 못한 것. 소유자인 조씨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배씨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어 실물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일각에선 배씨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낱장으로 보관하고 있거나 이미 외국으로 반출했다는 등의 소문까지 일기도 했다.

한편 검찰은 배 모씨에게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구형하였고, 2012년 2월 9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는 소유권이 없다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 놓지 않는 등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 대구고등법원은 항소심에서 배씨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배씨도 이전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면 물건을 내 놓겠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배씨가 영영 물건을 내 놓지 않을 까 우려의 시각도 있었다. 

이에 검찰도 상고하였으나 2014년 5월 29일 대법원에서도 최종 무죄 판결이 난 바, 배씨가 약속대로 이를 세상에 내 놓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요컨대 정리하면, 소유권은 이미 국가로 넘어갔지만 실물은 배 모씨가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됨. 하지만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으며,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약속대로 내 놓을 지는 확실하지 않음.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추가바람.

1.2.3.5. 제3의 판본 일부 발견

세종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던 모자마감재로 사용된 훈민정음 활자본이 보인다.

2013년 2월, 일본에 있던 조선왕실 유물인 비단 모자를 한 수집가가 구입했는데 이 모자가 이슈가 되었다. 이 모자가 먼저 1444년 이전에 세종이 사용하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으며, 이 안에 마감재같은 용도로 종이가 들어있는데 놀랍게도 그 종이가 훈민정음 제자해 활자본이었기 때문. 만일 세종이 쓰던 익선관이 맞다면 현재 남아있는 간송본과 상주본의 1446년을 앞서는 버전일 가능성이 높았다.[13]

그러나 검정결과, 모자가 임진왜란 이후의 것임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가라앉았다. # 하지만 여전히 조선 복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희귀 유물인 것은 사실이며, 모자 안에 훈민정음의 판본 일부가 있는 것 역시 사실.

1.3. 조선시대 훈민정음의 취급에 관하여

1.3.1. 대왕님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신 이유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국문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한 예로 한글 창제 이후로는 양반들이 한문을 공부할 때, 우리말과는 체계가 애초에 다른 한문글의 구절마다 한글로 된 토를 달아서(현토) 훨씬 배우기 쉽게 하는 등 양반들에게도 무척 유용했기 때문이다(그 이전에는 구결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양반은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예를 들어 집안의 여자 어른) 및 평민들과 글로 소통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14] 기본 소양으로 한글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은 글 읽기보다는 생계에 바빴던 평민층보다는 오히려 양반 부녀자층이나 중인층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며, 특히 실질적인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중인층에게 유용했다는 점에서 통치를 쉽게 한 점이 눈에 띈다. 

세종이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지었다면, 정작 그의 치세에 한글로 번역되거나 반포된 책들이 월인천강지곡 같은 불교언해나, 아니면 이성계의 역성혁명[15]을 정당화하는 용비어천가 등의 책들 말고는 주목할 만한 것이 왜 없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해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의 주된 창제 이유를 여기서 찾는 것은 오류이다. 애초에 양반들을 비롯한 지배층의 편의성이 주된 이유였다면 만들 때 반포 이유로 그것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고 반대에 부딪칠 이유도 훨씬 줄어든다. 

더욱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후 양반지배층 이외의 계층들 사이에서도 문화를 꽃피우는 근본이 되었다는 점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세종의 근본적인 의도가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한글학자 노마 히데키는 한글의 탄생에서, 당대 조선에서 사용되던 기록은 모두 붓을 사용하여 한자로 쓰여진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에 생기는 획의 삐침이나 획 사이의 여백, 그리고 글씨를 이어서 쓰는 연서 등은 필연적인 것이자, 동시에 글씨의 형태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자는 연필 등의 다른 필기구로 쓰여지지만 이러한 삐침은 사라지지 않고 획 자체에 포함되어 유지되고 있다. 

만일 사대부들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글씨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필기구인 붓을 사용할 것을 전제로 자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책 자체도 붓으로 쓰여졌으나, 훈민정음의 자모만큼은 그러한 삐침 등이 완전히 생략된,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간결함의 극치를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붓을 쓰던 시대에, 훈민정음은 자형을 만드는 단계에서 이미 을 쓰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은 붓과 먹, 종이 같은 필기 도구를 살 형편이 안되는 백성들까지도 훈민정음을 쓰게 될 것을 배려하여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자의 말을 덧붙인다.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이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낙서하듯 그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훈민정음에 연서와 삐침이 등장한 것은 창제 후 수 세기가 지나고 궁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많은 문자들이 대개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서체 미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위적인 형태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거의 근대 모더니즘을 연상케 한다.

즉, 세종이 한글을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펼칠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다.[16] 비록 다른 이유가 섞여있을 지라도, 가장 중요한 목적을 덮을 수는 없다. 

세종대왕이 공들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덕분에 당대의 많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우리들까지도 한글을 잘 사용하고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세종대왕이 꿍꿍이를 가지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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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정조가 원손이던 시절에 쓴 편지. 언문으로 되어 있다[17] 악필이다

이외에 다른 왕이나 왕족도 한글로 편지를 보낸 것이 많다. 더 보려면 여기 클릭. 네이버에서 언해본과 같이 공개했다.

1.3.2. 왕실의 입장에서 훈민정음

'언문'이나 '암클'은 구한말에 살았던 한글 학자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하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조선시대 내내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글 비하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하늘이 내린 위대한 성인(聖人)이신 세종대왕이 범인(凡人)을 초월한 성지(聖知)로서 지어낸 글자이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게 함정 아니 과소평가같은데 거의 최상급의 극찬을 바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이 극찬은 '하늘→성인=세종대왕→지혜→훈민정음'이라는 도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연히 세종대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드높이려는 의도가 있다. 

바로 지금 모든 사람들이 널리 쓰고 있는 문자보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알기쉽게 드러내는 업적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글로 써진 문장은 속된 것이며 낮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문자 자체는 왕조의 위업으로 여겨져 조선시대 내내 극한 칭송의 대상이었다.

1.3.3.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하는 언문(한글)투서를 보게 되면서 한글이 자신의 명예에 상처를 입히고 실추시켰다는 혐오대상으로 규정하여 훈민정음 및 한글 사용을 전면금지시키고 한글을 쓰는 자는 무조건 체포하도록 지시하였으며 훈민정음 사용 또한 전면금지하여 한글 관련서적은 소각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결국 이것은 선대왕의 업적을 모독하는 사례로 남게 되었으며 폭군과 독재의 기질을 가진 연산군의 포악성이 만대에 드러났음을 알리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환관 김처선이 자신에게 훈계를 했다는 이유로 김처선을 처형한 후 처서를 조서로 바꾸게 하는 등 가 들어가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한 적도 있었다.

1.3.4. 숙종?

숙종이 뜬금없이 훈민정음 후서를 썼다. 왕이 후서를 썼다는 것은 숙종대에 새로이 훈민정음의 중간본을 냈다거나 내지는 관련된 책을 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하지만 실록에 아무 기록이 없어 그냥 숙종이 책과 무관하게 쓴 것으로 보인다.

1.3.5.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 표현? - 언문과 암글(암클)

1.3.5.1. 언문

'언문'이라는 표현이 정말로 한글/훈민정음을 낮추어 보는 표현인가, 양반들이 한글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는가, 한글 창제 당시에 반대가 있었던 것의 진의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등의 문제들도 학계에서조차 분명히 결론이 나지 않았으므로 쉽게 단정짓기 어렵다.

원래 언(諺)은 한문(고문, 문어)과 대비되는 구어를 말한다. 중국에서 한문은 원래 전국시대부터 당나라시대까지 만들어진 고어에 해당하고 이후에는 거의 글로만 썼으며, 그 이후에 통용되는 구어 중국어는 한문과는 전혀 달랐는데, 바로 그 구어체 문장을 "언" 이라고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서도 아마 한글 문장을 이런 구어체 정도로 본 것 같다. 그러니까 꼭 낮춰서 불렀다기 보다는 그냥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구어)이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꼭 낮춰서 봤다고 보기도 어렵다.

국조보감에도 '언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일본의 가나 문자를 '언문'의 일종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리고 한글 창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할 것.

1.3.5.2. 암글(암클)

언문에 이어서 한문화에 익숙한 양반들이 한글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붙인 이름인데 이름의 뜻은 여자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는 뜻이었다. 원래는 암클이라고 불렀는데 국어 표준어상의 규정에 따라 암글로 바뀌었다.

이들이 암글이라고 비하한 이유는 한글은 천한 여인네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며 한문화를 중시했던 양반들이 비하하여 부른 것으로 언문에 비해서 호칭이 매우 천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글이 여자들만을 위해 썼다는 근거는 없다. 또한 세종 역시 한글은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만 백성이 널리 쓰도록 창제한 글이라고 반포하였기 때문에 여자들만이 쓰게 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애초에 상대방에게 개XX라고 욕했다고 그 사람이 개가 아닌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해명할 가치도 없는 비하에 불과하다.

1.5. 대중매체에서의 훈민정음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이 새 글자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다가 "民音訓正(백성의 소리를 새김이 마땅하다)"을 쓴 후 아나그램을 시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개그콘서트 위대한 유산 코너의 황현희가 등장할 때마다 훈민정음을 읊는데 "니르고져"를 건너뛰어버리고 "홇배이셔도"를 많이 반복한다.

백괴사전에서는 괴상한(…) 현대어 번역을 제시하고 있다.

2. 삼성전자의 워드프로세서


어원은 1. 1992년 처음 나왔으며 처음부터 윈도우용으로 개발되었다.

유년층을 대상으로 제작한 어린이 훈민정음도 있으며 MS 워드와 아래아 한글에 밀려서인지 훈민정음 워드프로세서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내부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다.

내부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삼성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워드 프로세서다. 삼성의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워드프로세서 간혹 가다가 삼성과 거래하는 신규 업체들이 사용을 못해 해메는 워드프로세서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삼성 PC를 구입하면 번들로 제공하기도 했으나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인지 이후에는 쿠폰 형태로 제공해서 쿠폰을 등록하면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끔 했으나, 역시나 다운로드 받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쿠폰은 그냥 버려지는 신세

훈민정음 개발 사업부가 분사되어 넥스소프트에서 개발되었지만 이후 넥스소프트가 한글과컴퓨터에 인수되어 다시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듯하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는 훈민정음XP까지만 나왔고, 그 뒤로는 정음Global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오류투성이의 프로그램으로 심심하면 뻗어버리는 프로그램으로 MS word와 한글에 익숙한 신입사원에겐 충격과 공포를 주지만 회사에선 딴 워드를 쓸 일 없다 보닏딴 어쩔수 없이 쓰게 되는 안습의 상황.

문제는 삼성보다 을인 업체에겐 갑의 횡포로 정음글로벌 파일을 던져주면 되지만 반대인
갑의 위치에 있는 국가기관에선 한글 파일을 던져준다. 그리고 외국기업에선 갑이고 을이고를 떠나 MS워드파일이 필요한 별 그지같은 경우도 생긴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실기 시험 때, 원한다면 정음글로벌로 시험을 볼 수도 있다. 아무도 안 고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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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ttp://www.youtube.com/watch?v=n_Ix9SL-vUQ 중세 한국어와 현대 한국어의 발음 차이
  • [2] 억양을 들어보면 서울 사투리와 비슷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 [3] '사람이'라고 된 부분은 원문을 직역하면 진짜 '놈이'이다.(위의 원문에 보면 '노미'라는 표기가 보일 것이다.) 저 시대에 '놈'은 비칭(卑稱)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 단어였다.
  • [4] 다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중국(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고, 흔히 말하는 '중원(中原)'의 다른 표현이 바로 '중국'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또는 '중화(中華)의 나라(國)', '세상의 중심(中)이 되는 나라(國)'라는 의미로 '중국'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애초에 '중국'이란 단어 자체가 중국 역대 왕조 및 국가를 통틀어 이르는 일련의 국가 체계를 의미하는 말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중국사'라고 해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만 배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5] 장강 이남, 즉 중국: 제비는 강남으로 간다. 명 초기에는 남경이 도읍이었다.
  • [6] 석가모니의 생을 다룬 일종의 불교 경전인,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세조의 석보상절을 합본화(?) 한 책, 석보상절 부분은 월인석보를 만들며 다시 써서 석보상절과 차이가 있다.
  • [7] 정인지 서문은 위치를 따지면 서문이 아닌 발문이나, 세종이 서문을 쓰기 전에 정인지가 이미 썼던, 굳이 말하자면 원조 서문이고 세종의 서문이 추가되면서 뒤로 밀려났을 뿐이라 위치와 무관하게 서문으로 불린다. '정인지 후서'라는 표현으로 불리곤 하는데 후서는 보통 책이 쓰인 지 오래 뒤에 추가적으로 쓰인 서문을 의미하고 훈민정음에는 숙종의 후서가 존재하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
  • [8] 이 낙장 두 장은 실록본을 베낀 가짜 페이지로 메꿔져 있었다. 내용은 같았지만 쓰이는 규칙이 차이가 있어서 금방 들통났다.
  • [9] 이용준의 왜곡이라는 설도 있다.
  • [10] 박종덕(2006)-훈민정음해례본의 유출에 대한 연구 <<한국어학>> 31호, 김주원(2005)-훈민정음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호
  • [11]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5655
  • [12] 불교에서 불상이나 나한상 안에 넣어놓는 물건을 뜻하는 것.
  • [13] 익선관에 새겨진 용의 발톱이 4개이기 때문.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이전까지 용의 발톱이 4개인 사조용복을 입었다가 1444년에 명에서 용의 발톱이 5개인 오조용복을 하사하여 이후 그것을 입었다고 나와있다.
  • [14]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평민과 토지매매 계약서를 쓴다거나.
  • [15] 실패했으면 역모다!
  • [16] 사실 그 이전에도 이두라는 문자가 있었지만 이두는 사용방법이 복잡했다.
  • [17] "상풍(가을 바람)에 건강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외숙모를) 뵌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립습니다. 어제 (보내주신) 편지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쁩니다. -원손(元孫)
  • [18] 여담이지만, 그녀와 그 오빠 이름은 본 항목에서 따온 거라고 한다. 해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