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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이모저모 알림이/지구촌 나들이 이모저모

아~! 그리운 금강산!






아~!

그리운 금강산!


 

한 상억 / 작시

최 영섭 / 작곡

신 영조 / 노래

 

가곡이란, 그 나라 민족 정서와 예술성이 짙게 밴 고유의 성악곡을 말한다. 모국어로 된 시를 노랫말로 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몇 나라 안 되는 희귀한 전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국 가곡이 독일, 이태리 가곡과 구분되는 것은 한국어, 한국 시를 노래말로 한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서양 음악의 구조와 원리를 따랐다고 하지만, 외형미를 추구하는 서양 음악과는 달리 우리 가곡은 안으로 녹아들고 그 여음에서 우러나는 우리 특유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가곡은 단순한 음악 쟝르의 차원을 넘 민족의 노래로서 그 시대의 희노애락을 같이 해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외금강 집선봉의 가을>

 


 그리운 금강산의 탄생


우리나라 3대 가곡(가고파: 이 은상 시, 김 동진 곡/ 비목: 한 명희 시, 장 일남 곡)의 하나인 '그리운 금강산'은 1962년에 일어난 6.25전쟁 12주년 기념식을 위하여 조국 강산을 소재로한 가곡을 만들어 달라는 교육부의 청탁으로 작사·작곡된 교향적인 합창 모음곡 중의 한 곡이다. 


이 합창 모음곡은 서곡, 간주곡 외에 합창 또는 독창곡으로서 산을 주제로 한 3곡과 강을 주제로 한 3곡과 바다를 주제로 한 3곡으로 엮어졌었는데, 그리운 금강산은 바로 이 모음곡 제 2부 처음에 나오는 독창과 합창곡으로 되어 있다.


나라 땅이 둘로 갈라져 갈 수 없는, 아름다운 금강산을 그리워 하는 내용이다. 이 곡은 작곡자 최영섭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61년 최 영섭은 KBS(당시 중앙방송)로부터 금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작곡을 청탁 받고 한상억 시인에게 작시를 부탁하여그리운 금강산이라는 시에 곡을 붙였다.


금강산의 절경과 또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 땅이지만 가지 못하는 심경을 표현한 3절로 이루어진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누구의 주재(主宰)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2절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아래 산해 만 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3절

기괴한 만물상과 묘한 총석정
풀마다 바위마다 변함없는가
구룡폭 안개비와 명경대물도
장안사 자고향도 예대로인가


(후렴)

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1961년 8월 18일에 완성된 이 곡은 1961년 9월 7일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녹음 되어 라디오로 전파를 타게 되었고, 1962년 10월 20일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에 포함되었었다.


 칸타타성악곡의 한 형식으로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보통 독창·중창·합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곡의 가사는 ‘누구의 주재(主宰)’였으나 인쇄 과정에서의 실수로 ‘누구의 주제(主題)’로 잘 못되었고, 원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졌으며,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을 계기로 작사자가 직접 일부 가사를 수정하여 ‘더럽힌 지 몇 해’는 ‘못 가본 지 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은 ‘우리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는 ‘예대로인가’로 바뀌어 불리워졌다.


작사자 한 상억은 원래 "관장하다, 주장하여"라는 뜻의 주재(主宰)라고 썼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고 고운 명산을 만들어 냈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인쇄과정의 실수를 양해 하여 준 관계로 그 이후 '주제(主題)'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사자의 의도에 맞게 '누구의 주재(主宰)런가'로 부르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이후 남북화해 분위기와 남북 이산가족 상봉,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공연 등을 통해 통일 염원의 상징적인 가곡이 되었으나, 북한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운 금강산'은 방송이 되자마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은 방송국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울었다.'는 팬레터를 수없이 보내왔다. 한편 음악회를 통해 이 가곡이 알려지게 되자 성악가들이 앞다투어 자기의 레퍼토리로 삼으려 했다. 


그 후에 많은 성악가들이 음반으로 취입을 하였고, 한국가곡 연주회에서는 필수 연주 곡목이 되다시피 했으며,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어 누구나 즐기는애창곡이 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무대에서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의 세계 3대 테너가 불러 많은 호응을 받은 바 있으며, 특히 플라시도 도밍고는 1995년 내한 공연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소프라노 홍 혜경과 베이스 연 광철이 함께 불러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1985년 남북 예술단 상호 방문 때, 평양에 간 성악가 이 규도 교수[당시 이화 여자 대학교 음악 대학 학장]가 고친 가사대로 연습은 했지만, 6·25 전쟁 때 아버지를 따라 월남한 사람으로서 평안남도에서 우리 가족이 어떻게 당하다가 내려왔는데, 고친 가사대로 도저히 부를 수 없다고 결심하고, 모란봉 극장 무대에 올라가선 ‘짓밟힌 자리’, ‘우리 다 맺힌 원한’, ‘더럽힌 지 몇몇 해’ 등 원본 가사대로 불렀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보복이 두려워 예술 공연단 일행이 평양 시내 관광에 나설 때 합류하지 않고 호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가만히 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2000년 인천 구월동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 「그리운 금강산」을 기리는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후에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개화 예술 공원'과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강화 평화 전망대'에도 노래비가 건립되어 전국에 총 3개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세워졌다.

 


 뮤지션 소개 


< 작사자 한 상억(韓相億:1915~1992)>



1915년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서 태어나 1935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김 차영(金次榮) 등과 함께 인천에서 '시와 산문' 동인으로 활동했고, 1956년 '자유 문학'에 시 '평행선', '네거리에서'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58년 인천시 문화상, 1963년 경기도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주간인천' 주필, '경기일보, 경기매일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시집으로 '평행선의 대결(1961)'이 있다.

 

< 작곡가 최 영섭(崔永燮,1929~  )>



1929년 인천 강화군 화도면에서 태어난 최 영섭은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하여 김 성태(동심초 작곡자) 교수에게 배웠으나 6ㆍ25 전쟁 중이어서 졸업하지 못하고, 대학 4년을 수료한 후에는 독일 비인 국립음대로 유학하였으며, 이화여고, 한양대 음대, 상명대 음악과, 세종대 음악과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인천시 문화상(1959년), 경기도 문화상(1961년), 한국음악상(1996년), 세종문화상(2001년), MBC 방송대상, MBC 가곡공로대상, 대한민국 방송대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을 받았다.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반영한 금강산 전설


 


<외금강 만물상의 천주봉 : 북한화가 최계근 그림>

 

금강산의 경이로운 경치로 인해 많은 전설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천하 절경의 명산 '금강산(金剛山)'.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대자연의 예술품인 금강산은 주봉인 비로봉(l,638m)을 정점으로 1만 2천을 헤아리는 수많은 봉우리들이 천태만상의 기(괴)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천 개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수정같은 맑은 물이 모이고 떨어지는 곳마다 폭포와 소를 이루고 있어, 변화무쌍한 산악미를 펼쳐주고 있다.


금강산의 수많은 명승들은 크게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나뉘어진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지리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겨 져 왔으며, 이름은 주로 봉래산(蓬來山)이라 불리어 왔다.


그리고, 춘하추동 4계절에 따라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태양에 빛나는 아침이슬 모습이 보석인 금강석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계곡과 봉우리에 짙은 녹음이 깔려 '신록의 경치를 볼 수 있다.'고 붙은 이름)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산이 '붉게 불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나뭇 잎들이 다 떨어져 나무와 바위의 구석구석을 뼈처럼 보여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다른 말로는 눈 덮인 산, 설봉산(雪峰山)이라고도 불림.)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밖에도 '금강산 1만 2,000봉'이란 표현은 불교 화엄경에 '동북 바다 건너에 금강산이 있는 데, 1만 2,000봉이라 이름하며 담무갈 보살들이 그 안에 상주하고 있다.'는 기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 외금강 구역 >


 만물상(萬物相)



만물상은 온 산이 우주의 만물을 조각한 듯, 층암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생김생김이 마치 세상 만물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과도 같아 예로부터 '만물초 혹은 만물상'이라고 불리운다.


금강산은 많은 신선과 선녀들이 산과 계곡에 내려와 노닐었고, 중국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구하기 위해 선남선녀를 보냈으며, 각종 짐승들이 금강산에 빠져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짐작하게 하고도 남는다.


한편, 설악산의 ‘울산바위’ 등 여러 곳의 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다가 금강산에 할당된 1만 2천 봉우리가 다 차 버렸기 때문에 멈춘 이야기는 재미나다.


 


<설악산의 울산바위>


울산바위의 전설


아주 먼 옛날, 하늘님이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잘 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에 모이도록 불렀다. 경상남도 울산에 있었던 큰 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으나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느림보 걸음걸이이다 보니,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금강산은 모두 빚어지고 말았다. 울산 바위는 그 한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고향 울산으로 돌아갈 체면도 없어 설악산에 눌러앉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설악산 유람길에 나섰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울산바위에 얽힌 전설을 듣고, 신흥사 스님에게 울산 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대가로 셋돈을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를 받아 갔는데.... 어느 해인가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부터는 세를 줄 수 없으니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옮기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울산 고을 원님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은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많이 자라고 있는 풀(草)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매 새끼를 불에 태워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 그러자 울산 고을의 원님은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으려니와 세를 내라는 말도 더는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 자와 ‘풀 초(草)’ 자를 써서 속초(束草)라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져오고 있다.



 구룡폭포(九龍瀑布)


(북한 천연기념물 제225호)



<외금강의 구룡폭포>


'구룡폭포'는  '중향폭포(衆香瀑布)'라고도 하며, 설악산의 '대승폭포(大勝瀑布)', 개성 '대흥산성(大興山城)'의 '박연폭포(朴淵瀑布)'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 중의 하나이다.


외금강 구룡동 골짜기에 있고, 높이 74m, 폭 4m. 밑 용추(龍湫)인 구룡연(九龍淵)은 깊이 13m이다.


폭포 밑에는 돌절구 모양으로 깊이 패인 '구룡연(九龍淵)'이라 부르는 폭포가 발달해 있으며, 옛날에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유점사 53불과 싸우다 패한 금강산의 아홉 마리 용이 싸움에 패하고 달아나던 중 여덟 용은 상팔담에 나머지 하나는 구룡소에 일시 피신하였다가 구룡연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전설이 폭포 속에 살아 있다.


또한 ‘구룡연’과 ‘구룡폭포’에는 맹인, 앉은뱅이, 귀머거리 이야기가 전한다. 장애를 고치기 위해 금강산 신계사에서 불공을 드리던 이들은 어느 날 계곡을 오르다 지축을 울리면서 '오색무지개'를 걸치고 나타난 거대한 폭포를 만난다.


놀라운 광경에 감탄을 한 나머지 귀머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앉은뱅이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안타까워 하던 맹인은 폭포가 궁금해 눈을 비볐더니 눈앞에 보였다고 한다. 장애인들을 완쾌시킬 만큼 '구룡연과 폭포'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는 이야기이다.

 

 상팔담(上八潭)




<외금강 구룡폭포 위에 있는 상팔담>


‘상팔담’은 '외금강 구룡폭포' 위에 있는 크고 작은 '여덟 개의 소(沼)'를 말하는데, 옛날에 하늘에서 내려온 '금강산 팔선녀의 목욕터'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와 관련하여 그 유명한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이 탄생한 곳이다. 원래는 '팔담'이라고 하였는데, '내금강의 만폭동'에 있는 팔담과 구별하여 '상팔담'이라고 부른다.


<외금강 구룡폭포 위에 있는 상팔담>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이 얽힌 그곳

선녀는 옥비녀라도 빠뜨린 것일까?
너무나도 시원한 계곡물은
정말

바닥 가득

옥으로 만든 비녀라도

잠겨 있는 듯 옥빛이다.



 

《금강산 팔선녀》전설 -> 아래 보기를 클릭하세요.


《금강산 팔선녀》전설 보기


 

 귀면암(鬼面岩)





바위기둥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은 기묘한 돌이 신비롭고, 마치 귀신의 얼굴과 같다하여 "'귀면암'이라 불렀다."하며, 선녀들이 귀신들의 방해 없이 만물상에 내려와 놀 수 있도록 신선들이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삼선암(三仙岩)




만물상 입구에 들어서면, 곧 왼쪽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바위 세 개가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맨 먼저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의 세 기암으로 이것이 여러 가지 전설과 결부된 ≪삼선암≫이다.


그 건너편에 바위 하나가 벼랑 위에 외따로 솟아있는데, 이것이 ≪독선암≫이다. 이 바위는 옛날에 네 신선이 금강산에 내려와서 장기를 두었는데, 그 중 한 신선이 훈수를 너무 많이 하다가 '미움을 받고 밀려나서 외로이 떨어져 있게 되었다.'는것이다.

 


 절부암

(도끼로 찍어놓은 듯하다 하여 切斧巖)





절부암은 바위 중턱에 도끼로 깊이 찍은 자리같은 흠이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는 그 위에 내려와 금강산 절경을 바라보는 선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혹된 한 나무꾼 총각이 그 선녀를 만나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에 '도끼로 바위를 찍으며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내금강 구역>


 비로봉 (毘盧峰)



비로봉은 높이가 1,639m로 금강산 봉우리 중에서는 최고봉으로서.... 높이 솟은 '일만 이천 봉'과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이다.

 


 명경대(明鏡臺)



명경대는 높이 90m, 너비 30m이며 1980년 2월 북한 천연기념물 제 231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 바위로 바위의 면이 반듯하고 적갈색을 띠고 있어 마치 거울을 산에 세워놓은 것 같다고도 하고, 또는 바위 밑 계곡물에 비치는 그림자가 거울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명경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명경대와 배석대 둘레에는 '십왕봉·판관봉·인봉·죄인봉·사자봉·지옥문·극락문' 등이 있다.


명소들의 경치가 아름답고 모두 기묘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전설에 의하면 '명경대'는 '신기한 거울'로서 사람의 마음 속까지 다 비쳐서 죄의 유무를 가려내므로 말미암아 배석대에 올라가 명경대를 향하여 꿇어 앉으면 저승의 재판관들인 '십왕과 판관'이 명경대를 보고 판결을 내려 '도장(인봉)을 찍는다.'고 한다. 그러면 사자가 죄인은 좁은 '지옥문'으로 보냈고, 죄 없는 사람은 넓은 '극락문'으로 보냈다고 한다.

배석대의 우묵한 곳은 '죄인의 무릎 자리'이고 홈은 죄인들이 흘린 '눈물 자리'라고 한다.



<내금강의 명경대 : 북한화가 정창모 그림>


 

《금강산 명경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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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명경대의 전설> 보기

 

 장안사(長安寺)





금강산 초입에 있는 장안사는 옛날 수많은 선현들이 금강산에 들러 이 사찰에 머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일제 강점기까지 존재하였으나 '한국동란'에 폭격으로 이제는 빈터만 남아 있다.


 

<해금강 구역>


 총석정(叢石亭)




총석정 구역은 휴전선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지 해금강 지역은 아직 극히 일부만 개방되어 있다. 기둥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서 있고, 150여 개의 입총(立叢)들이 20~30m 높이로 우뚝우뚝 줄지어 선 것이 동해의 푸른 물결과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배경음악>


 그리운 금강산 / 로망 드 마루 

 

 그리운 금강산 

작시: 한상억

작곡: 최영섭

노래: 신영조

 


누구의 주재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후렴)

수수만 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아래 산해 만 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그리운 금강산 / 정영자 

 

 합창곡 감상


 그리운 금강산 / 국립합창단 

 

 플라시도 도밍고 / 홍혜경 


도밍고는 여러 차례 내한 공연을 가졌는데, 1991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그의 첫 내한 공연을 시작으로 일년 뒤인 1992년과 1995년, 그리고 2001년에도 한국에서 공연을 했고, 금년에도 2016년 10월 2일 잠실체육관에서 75세 나이로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내한공연을 했다.


특히 1995년에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은 도밍고가 부른 “그리운 금강산” 만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앙콜곡 중 하나였지만 탁월한 한국어 발음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해서 역시 도밍고라는 감탄이 절로 나게 만들었다.


긴 시간 동안 연습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한국어 발음이 그렇게 좋은지 들으면 들을수록 감탄스러우며.... 그가 가진 뛰어난 음악성과 언어적 재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로 1995년 공연에서 “그리운 금강산”은 소프라노 홍 혜경과 베이스 연 광철이 함께 불렀다.

 

* 도밍고 :

그리운 금강산 1995년 공연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