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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배우들이 부른 추억의 노래" - 배우들의 노래 -


 



"한 시대를 풍미했던"


" 명 배우들이 부른 

추억의 노래"

- 배우들의 노래 -

 




 

          ※ 사진설명


'팔도강산'은 1967년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한 국책 홍보 계몽영화로 황 정순, 

김 희갑, 김 승호, 박 노식, 허 장강 등 아래에 소개되는 한국 최고의 배우들이 다수 출연한 영화입니다.

 

1960년대는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신파, 

액션, 코메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온 국민의 가슴에 파고들어 시름을 달래

주고, 희망을 심어주던 우리 시대의 진정

한 광대, 그들은 독특한 인상과 행동의 

개성적인 연기는 당대의 관객들을 사로 

잡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지금도 

남아있는 명배우들입니다.

.

대한민국 영화사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길 

이들 배우들이 영화를 사랑해 준 팬들을 

위해 노래를 선사했습니다. 


처음 노래를 취입한 배우들의 가창력은 

다소 부족 하지만, 마치 연기하 듯 노래를 

소화해냈습니다.


지금은 작고한 배우들이 많기에 그들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이 부른 노래들은 영화사적으로도 진귀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음질 상태는 좋지 않지만, 이들의 

명연기를 회상하며 감상해주기를 바랍니

다.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1963 년 신필림에서 제작된 동명의 드라마, 

영화 주제가. 전 응주 감독 작품으로 김 승호와 

황 정순이 주연으로 출연했었다.


한꺼번에 망해버린 사돈이 체면 때문에 몰락한 

형편이어도 내색하지 않고 있는 척 여유를 보이

려고 노력한다. 


계속 어려움이 닥치고 궁지에 몰리게 되자 두 

가족은 지금까지의 허식을 버리고 솔직한 모습

으로 돌아가고, 노력하여 결국 다시 일어서야 

된다는 내용이다.


음치에 가까운 김 승호가 직접 주제가를 불러 

화제가 되었고 음반까지 취입했다.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김 승호


작사 유   호

작곡 황 문평


 


 


내가 내 멋에 살아가는 게
우리들 인생이 아니겠어요
배고파 물 마시고 이를 쑤셔도
이것이 내 멋인데 무슨 상관야

아이구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이런 제길

때로는 밤하늘의 별이 무색해
텅 빈 감정을 웃어도 본답니다.


제가 제 멋에 살아가는 게
우리들 인생이 아니겠어요
그까짓 돈 없으면 못산다더냐
여봐라 길 비켜라 내가 가신다.

아이구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이런 제길

울자니 남부끄러 기가 맥혀서
텅 빈 가슴을 주먹으로 칩니다.

이 사람아 울면 되는 건가 천만에,

웃으라구 응 허 허 허 허 ~ ~ ~ ~ ~


 

 김 승호

[金勝鎬 1918.7.13 ~ 1968.12.1]


 


<1961년 마부>

 


김 승호는 1918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

났다. 

본명은 '해수'이며, 4살 때 서울로 이주

하여 서울 청진동 부근에서 성장하였다.


보성고보를 중퇴하였으나 후에 한양대학

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김 두한(金斗漢)의 

소개로 동양극장 극단을 통하여 배우로 

입문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극단 신협의 

무대에 오르는 등 약 25년간 연극에서 

활동하였다.


그후 해방을 전후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 <자유만세> (1946) 등의 

작품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김 승호의 출세작은 1956년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이었다. 


이 영화는 아시아영화제에 출품되어 

국내영화로는 최초로 '특별상'을 수상

했다.


1960년대 김 승호는 수많은 히트작을 

남기게 되는데, 이중에는 <로맨스 

빠빠>(1960), <박서방>(1960), 

<마부>(1961), <만선> (1967) 등 

한국영화사 길이 남을 걸작들이 수두

록하다. 


특히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로맨스 

빠빠>에서 주연한 김 승호는 일본 도쿄

에서 열린 제 7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돌풍을 일으

켰다.


그의 대표작인 <마부>로 그는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따낸다.


그는 평생을 영화인으로 살았고, 인생 

말년에는 제작자로 나서기도 했던 김 

승호는 1968년 12월 1일 향년 51세로 

청진동 셋집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 허 장강, 김 승호, 김 희갑 >

61년 서울의 지붕 밑



 

 울며 헤진 부산항 


김 희갑


작사  조 명암

작곡  박 시춘

노래  남 인수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 보는
연락선 난간 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드라 이별만은 슬프드라
더구나 정 들인 사람끼리 음

달빛 아랜 허허 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 곳 없는 검은 수평선
이별만은 무정트라 이별만은 야속트라
더구나 못 잊을 사람끼리 사람끼리


 

 김 희갑

[金喜甲, 1923.7.13 ~ 1993.5.18]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 국민배우 

김 승호와 대비되는 '아버지상'으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한 김 희갑 역시 국민배우였다.


특히 그가 1967년에 출연한 <팔도강산>

(감독 배 석인)은 엄청난 흥행기록을 수립

하면서 시리즈로 이어져 70년대까지 

제작되면서 수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한의원을 경영하는 딸

부자집의 아버지로 등장하여 평생 콤비인 

여배우 황 정순과 실제 부부로 착각할 만큼 

리얼한 연기를 선보였다.


1923년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난 그는 

반도 가극단에 입단하여 처음에는 가수로 

활동하다가, 어느 날 공연을 펑크낸 배우의 

대역을 하다가 그의 연기력을 높게 평가한 

단장의 배려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극단에서 그의 코메디 연기는 높은 인기를 

누렸고, 마침내 김 희갑은 1956년 한 형모 

감독의 <청춘쌍곡선>으로 스크린에 데뷔

한다.


당시 동료 영화배우이며 코미디언인 구 봉

서와 함께 '합죽이·막둥이’라는 예명으로 

콤비를 이루어 서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후 그는 <오부자>(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와룡선생 상경기>(1962), <팔도강산>(1967) 등의 대표작

들을 남기며,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코미디언이라기보다는 성격배우로서 

극장의 쇼 무대나 텔레비전 방송에 수없이 

출연하여 옛 가요들을 불러 인기를 모으면

도 항상 실향민으로서의 한을 호소한 대

표적인 연예인이었다.


평생을 배우로 살았고, 익살스런 모습으로, 

때로는 다소 과장된 캐릭터로 평생을 함께 

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광대 김 희갑은 

1993년 5월 18일 향년 70세의 일기로 우

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메밀꽃 필 무렵(1967)

허 장강.김 희갑.박 노식


 

 깍두기 신사 


허 장강(1968)


작사, 작곡 황 하룡



 


네온의 불빛따라 걸어보는 이 한 밤
나도 몰래 옛 추억이 눈물 속에 아롱지네
이제 와서 바보처럼 울긴 왜 울어
인생이란 꿈과 같은 수수께낀데
주름 진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래뵈도 그 옛날엔 멋쟁이 신사
아~ 이 밤도 깊어가는 충무로 거리

밤 하늘 별빛따라 걸어보는 이 한 밤
세월따라 흘러버린 옛 추억에 눈물 지네
이제 와서 바보처럼 울긴 왜 울어
인생이란 꿈과 같은 수수께낀데
지금은 사라진 꿈이건만은
이래뵈도 그 옛날엔 깍두기 신사
아~ 이 밤도 깊어가는 충무로 거리


 

 허 장강


[許長江, 본명 허 장현(許長顯),

1923 ~ 1975]

 


 

한국영화사 최고의 성격배우로 손꼽히는 

허 장강은 1923년 서울 왕십리에서 출생

했다. 


해방이 되고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이 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으로 

데뷔하여 영화배우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그는 독특한 인상과 개성적인 연기

로 당대의 관객들을 사로 잡았으며 악역

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명배우다.


그의 이미지는 사기꾼, 건달, 깡패, 보스 

등 악역 전문배우로 굳어 있었지만, 아시

아 영화제에서 '상록수'(61) '꽃상여'(75) 

63년 대종상에서'연산군'으로 남우 주연

상을 '사격장의 아이들'(68),과 '독짓는 

늙은이'(70)에서 남우조연상을 받는등 

악역이 아닌 역에서도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주면서.... 5-60년대 최고의 연기파

로 칭송받으며 한국영화사 전무후무한 

연배우로 인기를 누렸다.


1975년 9월 2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4회 새마을 돕기, 연예축구대회에 

출전했다가 향년 52세에 심장마비로 별

했다.


 vvvvvvvvvvvvvvvvvvvvvvvvvvvvvvvvv


 '신화를 남긴 해병'(1965)의

허 장강과 박 노식


 

 사랑이 메아리칠 때 


박 노식(1968)


작사 서 인경

작곡 박 춘석

노래 안 다성

 




< 노래 가사 생략 >

 


 박 노식

[朴魯植:1930 ~ 1995]



 

박 노식은 1930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

했다. 


순천사범학교 체육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후 1955년 이 강천 감독의 <격퇴>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1961년 <5인의 해

병>이 대히트하면서 스타덤에 오른 박 

노식은 이후 1960년대 한국 영화의 황

금기를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배우 박 노식은 많은 사람들이 액션배우

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많은 캐릭터를 연기

한 전천후 명배우 중 하나다. 


이 시기에 그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5), <메밀꽃 필 무렵>(1967), <카인의 

후예>(1968) 같은 문예영화에 출연하여 

각영화제에서 주연상과 조연상 등 연기

상을 휩쓸었다.


1970년 <남대문 출신 용팔이>가 대히트

하면서 '용팔이 시리즈'가 연이어 만들어

지기도 했다. 

주먹 하나로 거친 세상과 맞장을 뜨는 박 

노식의 호탕한 웃음과 손가락 잘라버린 

검은 가죽장갑을 유행시킨 박 노식의 카

리스마는 영원히 우리의 추억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1971년 감독으로도 데뷔를 하며, 한 시

대를 풍미했던 국민배우 박 노식은 

1995년 65세의 나이로 오직 '영화에 

살다' 인생을 마감했다.


 


  해. 장 동휘. 허 장강


 

 가버린 사랑 


황 해, 백 설희(1964)


작사 남 상포

작곡 손 목인


 



 

< 백설희 >


만난들 무엇 하리 찢어진 사랑
내 가슴 갈기갈기 찢어만 주네
내가 왜 내가 왜
못 잊어 찾아왔나 가시밭길을
運命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워
가 버린 사랑 가 버린 사랑



< 황해 >


행여나 그 옛 님을 만나게 될까
고개를 넘고 넘어 헤매다 왔네
내가 왜 내가 왜
못 올 길 왔느냐고 외쳐 보건만
얄궂은 이 발길을 돌릴 길 없네
가 버린 사랑 가 버린 사랑



 

  

[黃海, 1921.3.6 ~ 2005.2.9]


 

 


1921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1936년 

경성상업고등학교(지금 서울 사대부고)

를 졸업했다. 


예명인‘황해'(黃海 : 본명 전 홍구)는 '황

바다처럼 넓고 깊은 연기를 하라'는 한 

노인의 말을 듣고 지었다 한다.


재학시절에 그는 고향을 찾았다. 마침 그

에서 열리고 있던 '신카나리아' 소속 

성보 악극단 공연을 보러갔다가 노래자랑 

시간에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노래를 듣던 신카나리아가 ‘만

일 가수가 되고 싶으면 나를 찾아오라.’고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가수의 꿈을 접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신카나리아의 성보악극단에 

들어가게되고, 바로 합창단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신카나리아와 1941년에 

중국로 건너가서 '손 목인'선생이 이끄

는 신태양 극단에 스카웃되어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 현인, 박단마, 황정자, 이해연,등 

쟁쟁한 멤버들과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 가수 백 설희와 결혼한 그는 

1949년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로 

영화배우로 데뷔하게된다. 


이후 같은 감독의 '청춘쌍곡선(1956)', 

'5인의 해병(1961)'. '마부(1961)', 

(1963)' 등 총 20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및 조연으로 연기했으며, 특히 액션 영화

에서 빛을 발했다.


동 시대의 개성 있는 연기파 배우로 평가

받은 독 고성, 허 장강, 장 동휘, 박 노식

등과 함께 50~6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붐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윤 정희와 공동주연을 한 <독짓는 늙은이>(1969)다. 


황 순원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으로

각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2003년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

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던 그는 2005년 

2월 9일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향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단란했던 황 해, 백 설희 가족,

     기타 치는 이가 장남 전 영록임.


 

 외나무 다리 / 최 무룡 


작사 반 야월

작곡 이 인권


 



 음질 상태가 좋지 않아 노래부분은 더빙함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웁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어여쁜 눈썹달이 뜨는 내 고향
둘이서 속삭이던 외나무다리
헤어진 그 날 밤아 추억은 어디
싸늘한 별빛 속에 숨은 그 님을
괴로운 세월 속에 어이 잊으리.


 

 최 무룡


[崔戊龍, 1928.2.25 ~1999.11.13]


 


 최 무룡과 강 효실


 

최 무룡은 1928년 파주 문산에서 태어나 

개성상업학교를 나와 중앙대학교 법대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1949년 연극〈햄릿〉에서 

주연을 맡았다.


또한 1948년 KBS가 모집한 방송연기 

연구생 모집에 합격하여 구민, 윤 일봉, 

백 금녀(본명 김 정분), 등과 함께 방송

연기생활을 하게 된다. 


성우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에 방송연기

자라고 불리던 시절이다.


6.25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최 남현, 

전 옥, 강 효실 등이 참여한 공연극장에 

함께 무대에 섰다. 


이 중에서 전 옥은 1920년대부터 연극, 

영화에서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며 인기를 

모아 온 중진 배우였고, 강 효실은 그의 

딸이었다. 


최 무룡과 강 효실은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1954년 이 만흥 감독의 6.25전쟁과 관련

된 반공영화 <탁류>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후에 유 현목 감독의 <오발탄>(1960), 

<5인의 해병>(1961), <돌아오지 않는 해

병>(1963), <빨간 마후라>(1964) 등 

한국영화의 전성기의 전쟁물에 출연하면

서 큰 인기를 모았다. 


이 밖에도 KBS 드라마를 영화로 제작한 

<꿈은 사라지고>(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남과 북>(1966) 등 

무려 500여 편에 이른다.


또한 <장마루촌의 이발사>에서 김 지미

와 함께 출연하며 가까운 사이가 되버린 

1962년에 드디어 두 사람은 불륜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구속 일주일만에 풀려나 활동을 

재개하였다.


최 무룡은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으

나 흥행실패로 결국 재산은 탕진되고 김 

지미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당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후에는 잠시 미국에서 머물다가 온 최 

무룡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 종필 총재의 권유로 신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파주에서 당선되자 

정가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의 다큐멘타리 영화와 같이 살았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1999년 11월 

13일 향년 72세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정부는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보관문화훈장(寶冠文化勳章)을 추서하

였다.


 


 1972년 개봉한

최 무룡, 김 지미 주연의 영화

'결혼반지'의 한 장면


 

 사랑찾아 왔어요 / 최 은희


작사   

작곡 김학송


 



<노래 가사 생략>


 

 최 은희

[崔恩姬:본명 崔慶順]

1926년 11월 20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고,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를 통해 영화 배우로 데뷔

했다. 


영화 촬영 감독 김 학성과 결혼했다가 이혼

하고 1953년 영화 감독 신 상옥과 재혼했

다.


1978년 1월 14일 홍콩에서 북한 김 정일의 

지시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남편 

신 상옥도 그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홍콩

으로 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에 역시 납북

되었다.


납북된 이후 최 은희는 북한에서 신 상옥이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북한체류 8년만에 목숨을 건 북한 

탈출을 감행했다.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에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탈북에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에서 신 상옥 감독과 

함께 영화예술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 

미국으로 망명까지 해야만 했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더 이

상 영화 활동은 하지 않았다.


 

 신 상옥과 최 은희 


 

 


 북한 체류시 신 상옥 최 은희 부부


 

최 은희는 6.25 전쟁 당시에 강제로 부역

을 하면서 연기자로서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이런 위기에서 그녀에게 여배우로

서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것은 신 

상옥 감독과의 만남부터였다.


1953년 신 상옥 감독과 결혼한 이후에 

그녀는 신 감독의 <지옥화>(1958), 

<상록수>(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

니>(1961), 임 원식 감독의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로 주요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을 휩쓸었다.


최 은희란 배우를 떠올리면 항상 신 상옥 

감독 이름이 함께 나올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동반자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영화 스틸컷


 

 빨간 마후라 / 신 영균


작사 한 운사

작곡 황 문평

노래 쟈니브라더스


 



<노래 가사 생략>


 

 신 영균

[申榮均, 1928.11.6~ ]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사왔다.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연극부에서.... 

활동한 경험으로 입단해 신극 운동에 참

여했다.


그러다 전문직업을 얻고자 서울대학교 치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58년 서울 회현동에‘동남치과’

를 개업했다.


대학시절 연극을 했던 인연으로 1960년 

연극 <여인천하>에서 조 광조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게 된다.


당시, 영화 <과부>의 주인공을 물색하던 

조 긍하 감독이 그 무대를 보게 되고, 조 

감독의 제안으로 32세의 늦깍이 나이에 

영화 <과부>로 영화계에 전격 데뷔하였

다.


그 뒤 <마부>(1961), <연산군>(1962), 

<빨간 마후라>(1964), <남과 북>

1965), <미워도 다시 한번>(1968) 등

에 출연해 한국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끌

었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김 진규, 

최 무룡, 신 성일과 함께 주로 여자 배우

에 의해 주도되어 온 영화계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국내외 유수의 영화 시상식에서 

남우 주연을 휩쓸며... 1960년대 영화

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다.


1970년대 초반 이후에는 사실상 연기자

의 에서 은퇴하고 명보극장과 명보제

과 등을 경영하는 등 사업가로 변신했

다. 


그리고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한국예

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까지 

임하였다.


1996년 김 종필 총재의 권유로 신한국

당에 입당하여 제15대, 16대 각각 신한

국당, 한나라당 소속 비례대표로 당선

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 "새로운 정치를 위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떠날 때가 됐다. 


이제 우리 정치와 한나라당을 위해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 볼 것"이라고 말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10년에는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양성을 

위해 500억 원 상당의 사재를 기증하여 

화제를 모았다.


 


 1965년 '남과 북' 스틸컷

(신 영균, 최 무룡, 엄 앵란)


 

 나는 가야지 / 문 정숙


영화 배우이자 가수로 큰 사랑을 받았던.... 문 정숙의 데뷔곡, 대표곡인 

'나는 가야지'는 1959년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노 필 감독과 작곡가 손 석

우가 음악을 맡은 영화 '꿈은 사라지

고'의 주제가이다.


당시 HLKA(KBS 라디오)연속극 꿈은 

사라지고(극본 김석야)가 빅히트하면서 

영화로 제작어 남자주인공인 복싱

선수역엔 당대 최고의 배우 최 무룡

이었고 상대 여자 주인공 역은 문 정숙이 

맡았다.


당시 라디오 연속극 '꿈은 사라지고'의 

주제는 안 다성과 KBS 합창단의 

목소리로 방송되었지만 영화에서는 

주제가를 최 무룡이 그리고 문 정숙은 

이 영화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 

'나는 가야지'를 부른다.


영화에서 배우들이 직접 노래를 부른 

것도 이 영화가 처음이며 한국 최초의 

권투 영화이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은 머지않아 세계올림픽에 

출전할 권투선수이다. 그에게는 아름답

고 청순한 애인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카바레 여급이었고 그것을 알게 

된 그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연습은 

고사하고 술로써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코치의 끈질긴 설득과 격려로 

마침내 기한 그는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리스트가 되는데...


 


 1959년 '꿈은 사라지고' 에서

권투선수 최 무룡


 

 나는 가야지 / 문 정숙 


작사 김 석야

작곡 손 석우


 


 


겨울이 가고 따뜻한 해가 웃으며 떠오면
꽃은 또 피고 아양 떠는데 노래를 잊은 이 마음
비가 개이고 산들 바람이 정답게도 불면
새는 즐거이 짝을 찾는데 노래를 잊은 이 마음

아름다운 꿈만을 가슴 깊이 안고서
외로이 외로이 저 멀리 나는 가야지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 쓰라린 이 마음
다시 못 오는 머나먼 길을 말없이 나는 가야지


 

 문 정숙

[文貞淑, 1927.3.12 ~ 2000.3.1]

 



 

1927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문 정숙은 

월남하여 보성여학교를 다니던 17세 때 극단 

아랑에 입단하여 연기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예술극회와 신협을 거치면서 A급 배우로 

성장했다.


스무살 때, 영화제작자 장 일을 만나 1948년 

결혼을 하였으나 1965년에 이혼하였다.


이혼 이유는 바로 문 정숙과 이 만희 감독이 

연인관계로 발전했기 때문인데, 문 정숙은 영화

배우로서 걸작들을 남기는 대신에 가정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영화 데뷔는 1952년 신 상옥의 감독 데뷔작인 

<악야>를 통해서였다. 


1958년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이 강천 감독의 1958년작 <생명>을 통해 

주연급 스타 배우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에 출연한 이 만희 감독의 미스터리 

스릴러 <다이얼 112를 돌려라>가 히트하면서 

문 정숙은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한다. 


이후에 이 만희 감독과 콤비를 이루어 <마의 

계단>(1964), <만추>(1966), <시장>(1966), 

<귀로>(1967) 등 여러 작품을 함께 하면서 

이 감독과의 로맨스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1959년 노 필 감독의 <꿈은 사라지고>에서 

이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불렀다. 


이미 1953년 가수로도 데뷔한 그녀는 가창에도 

소질이 있어서 <꿈은 사라지고>, <심야의 

부르스>, <예라이샹> 등에서 부른 주제가는 

음반으로 발매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1960년대 광녀, 창녀, 빠걸, 교사, 유부녀 

등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최 은희 조 미령과

함께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시 영화제인 부일상, 청룡상,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성격배우로 명성을 

떨치던 그녀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주관하는 

"문 정숙 회고전"이 막 열리려던 참에 개막을 

불과 5일 앞두고 2000년 3월 1일 74세를 일기로 

갑자기 타계, 주위를 안타깝게했다.


 


 1964년 '마의 계단' 영화 스틸컷

(김 진규 . 문 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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