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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국을 빛낸 사람들

◆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의 참 뜻은? ◆ / http://goo.gl/jRfi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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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thology365 of GOD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知彼知己,百戰百勝,不敗!"

"必死卽生,必生卽死!"

[下記作成者의글=共有出處告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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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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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0]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11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소식은 4월 13일에서야 종 순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을 때였다. http://goo.gl/jRfi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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