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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국을 빛낸 사람들

성리학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성리학

性理學.

목차

1. 개념
2. 성리학을 위한 변호
3. 성리학에 대한 비판
3.1. 고증학의 비판
3.2. 소라이 학의 비판

1. 개념 

송나라 때 외래사상인 불교에 대응하면서 재정립된 유교.

도학(道學), 송학(宋學), 주자학 등으로도 불린다. 영어로는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고도 한다.

원래 유교는 형이상학적으로 현란하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학문체계였다. 그러나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데, 불교는 그 때까지 중국인들은 생각도 하지 못하거나 어렴풋하던 개념, 사상, 지점 등을 깊게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가철학도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재조명받기 시작한 것. 참고로 불경이 최초로 한문으로 번역되어 중국에 소개된 때가 AD 2세기 중엽, 후한 말이다.

그런데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서 불교가 요즘 한국 개신교처럼 사회적으로 폐단을 일으키게 되면서 점차 불교를 극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기게 됐고, 이 때부터 유교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성리학에 반대하는 일본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불교화된 유교, 즉 불교 짝퉁이라고 취급하기도 한다. 허나 이는 일본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성리학 이후 등장한 명청대 유학자들, 특히 양명학과 고증학자들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되어 온 관점이다. 뭐 그래도 관학으로서의 명맥은 청 말기까지 이어졌다고 하지만.

중국에서 불교가 융성하고, 그 철학적 바탕과 종교적 친화력으로 중국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고 윤리적 사회적 규범이 되어버리면서 그 폐혜가 커지게 되었다. 몇몇 유학자들은 과거의 유학 경전들을 재조명하고, 이를 우주론적, 자연과학적, 철학적인 측면에서 재해석함으로서 새로운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이들 중 성(性)이 바로 리(理)다(=성즉리설)는 입장을 택한 일련의 학자들이 나타나는데, 정호, 정이, 주돈이, 장재, 소옹 등이 초기 성리학의 개척자들이다, 이들의 연구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독자적 체계를 세운 것이 주자로 불리우는 주희. 그래서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 부르는 것.

특히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의 철학적인 면을 특히 강조하여 발전시킨 면이 크다. 다만 조선 초기 주자의 정치이념과 종교비판에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서서히 이기론의 철학논쟁으로 초점이 넘어가면서 이기론 철학이 성리학의 전부인 것 양 오해되는 수가 많다.

성리학의 중요한 포인트는 심(心, 마음)의 두 측면인 성(性, 본성)과 정(情, 감정)을 각각 리(理)와 기(氣)로 규정하는 것[1]. 그리고 리와 기라는 개념을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현실의 사물과 현상등에도 대입한다. 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리는 기의 구성 원리인 것. 비유하자면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합쳐 '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이 서로 조응하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법칙이 '리'라고 하겠다. 이기론을 사람에 적용해서,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이 사람들의 개성을 만들고,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원리(인의예지)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기질의 차이에 따라 만물에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 데, 이 점이 인간끼리 혹은 인간과 동물사이의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특히 이기론은 조선 중기이후 중요한 떡밥으로 자리하는데, 사람들의 개성과 계몽의 실천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문자놀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성리학의 인식론적, 철학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위에서 이야기했는데 애초에 조선의 유림들이 주자에 열광하게 된 이유는 주자가 보여주었던 불교에 대한 집요하고도 근본적인 비판 때문이다. 그의 저서와 사상 중에 많은 부분이 내세, 영혼, 환생과 같은 자연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없는 존재에 대한 단호한 부정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주자의 종교관을 요약하자면 "내세나 귀신을 믿는 삶 따위는 살아도 죽은 것이다". 
주자의 '귀신론'은 그의 사상의 가장 실천적이고 근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의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기게 된다고 보았다. 도교나 불교의 존립기반인 선계나 내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된다.

따라서 주자의 사상은 철학적인 바탕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희가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 후레자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때문에 주희가 조상에 대한 제사에 대해서만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중론이다. 타협했다고는 해도 주자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하지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차례나 제사를 지낼때 조상의 영혼이 밥먹으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자손이 모임으로서 흩어져있던 조상의 기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귀신을 모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을 기리는 행위 자체가 본질인 것이다.

흔히 성리학(주자학)에서 과도하게 형식에 집작한다고 비난받는 부분은 사실 성리학 체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가 살아있던 당시의 관혼상제의 문제였다. 송대의 가례(家禮)가 과도하게 경직되어 만들어진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현실적인 예법을 보급하려는 것이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의 의도였다. 물론 12-13세기 송대의 예법이 후세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이이를 비롯한 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주자가례를 재해석하고 당대에 맞는 예법을 보급시키려 노력했다.

충효(忠孝)를 이용해 백성을 국가권력에 예속시키는 일도, 성리학에서 비로소 나타난게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유서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충효사상을 가르치는 도덕선생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보다도 오히려 역성혁명을 긍정하기 까지 하는 것이 주희 시대의 신유학적 정치관점이었다. 
한왕조 이후 천년이상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되던 맹자를 다시 주요 경전에 포함시킨 것도 주희의 업적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맹자'를 읽기가 매우 껄끄러웠는데, 걸핏하면 정치를 제대로 못하고 인성이 글러먹은 왕은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는 군주의 전제정치가 약화된 시기였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민계층이 형성된 시기였던 것이 이같은 진보적 관점을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과 반달리즘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중국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유교가 다시 자리 잡는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물론 남송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천과 의지를 중요시하는 자기개발서 비슷한 관점이 명대의 주류가 되었지만...

주자의 정치론은 오히려 서양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동양의 사상이 유럽에 소개된 것이 17세기 이후인데, 카톨릭 선교사들이 동양선교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나름대로 지성인들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만주족 출신 황제를 모시느라 무척 어용화된 유학의 관점에서 소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에 소개될때는 이상적인 계몽군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감탄을 샀다고 한다.

한편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개혁적 열망은, 성리학을 도입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몰아내는 지식인들의 거대 프로젝트로 결론이 내려지고 군부의 쿠데타와 협력하여 조선왕조가 세워지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의 논의는 구 고려왕조 시대의 종교적 생활방식을 타파하는데 있었다. 성리학이 윤리적, 경제적 생활 이념으로 완전히 체화된 것은 퇴계와 율곡이 등장한 16세기 후반이었다.

반면 동시기의 중국에서는 오히려 양명학이 주류가 되어 있었다. 금나라와 몽골에 오랜기간 시달린 중국 지성인들이 송대의 엘레간트한 철학적 사변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즉 세상의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 좋은 본성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 유학 전반을 지배했다. 일본의 경우 과거를 몇차례 시행하긴 하였으나 유명무실하였기에 성리학을 비롯한 유학은 일부 학자들만 연구하는 취미생활 정도에 머물렀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송나라에서 창시되었으나 조선에서 재발견되고 발전되어졌다.[2].

2. 성리학을 위한 변호 

조선왕조 후기의 몰락 과정에서 교조화된 성리학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국사학계와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에 대해 옹호측에서는 조선왕조의 몰락은 정치체제나 제도적 문제에서 찾아야지 성리학이라는 학문체계 자체를 놓고 조선왕조의 몰락원인을 삼을 수는 없다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사실 조선이 망국에 이르도록 성리학이 꾸준히 득세하여 그와 대척점에 선 학문 자체가 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때문에 그나마 실사구시라는 특성으로 기존 성리학과는 차별점을 보이는 실학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실학이라는 말 자체가 일제시대에 새로 생겨난 표현이지 당대 조선학자들의 표현은 아니다. 또한 성리학에서 핵심은 '성=리'라는 해석인데, 이른바 실학자들 중에서 '성=리'라는 해석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기학(氣學)이라는 책을 쓴 최한기 말고는 거의 없다. 부분적으로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난 경우는 물론 있지만, 그건 율곡 이이의 저술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이다. 즉 실학조차도 성리학의 대척점으로 보기엔 그 한계가 명확하며, 결정적으로 현대 들어서야 재조명 될 뿐이지 애초에 실학파 자체가 기존 성리학에 견주면 극히 마이너였다.

당연히 조선이 망한 후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이 조선을 낼름 접수할 수 있게 기여했다며 조선 성리학의 경직성을 비판적으로 취급했으며, 일제강점기가 끝난 현대 들어서도 부정적인 평가는 여전하여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정체성 때문에 나라가 기울었다는 식의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는 그 성리학으로 득세한 조선이 이전 왕조인 고려의 망국을 비하하며 불교를 까대는 논리로 즐겨 우려먹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으로, 사실 어떤 시대든 그 이전 시대의 몰락을 그 시대의 지배적 사상에서 찾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3]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후반이 지금의 조선시대 후반과 비슷한 이미지를 유지하며 숭유억불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 몰락의 원인은 잦은 외세의 공격과 특권에 젖어 부패한 승려들 때문이지 결코 불교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듯, 그 불교를 갈아마시며 조선 내내 득세한 성리학 역시도 본질적으로는 성리학 그 자체가 아니라 기득권자이자 전 시대의 승려들처럼 권위에 젖어 썩은 "성리학자"들이 문제라고 봐야 한다며 사상이나 제도가 어떻든 그걸 운용하는 사람이 썩으면 다 썩는다[4]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인식으로 말미암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1990년대 후반에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근데 주자를 죽여야지 왜 애꿎은 공자를...이라지만 주자도 결국 공자를 연구한 학자였으니 물론 아직까지도 수꼴스럽게 TV에 나와서 호주제 폐지를 놓고 미풍양속이 사라진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유림까지 있어서 가뜩이나 상할대로 상한 성리학의 이미지를 더 버리기도 한다[5]. 성리학이 워낙 종법을 강조하다보니 연장자와 남성 중심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부장적 관습과 국가주의의 강화로 인한 신분차별 등의 폐단은 조선시대에만 일어났던 일도 아니다.

다만 성리학이 조선 건국 이후 가부장적 종법질서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적 기원이 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가부장적 종법질서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마련하는 사상과 종교는 문명권과 국가를 막론하고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문명이 종교개혁을 비롯해 개혁에 개혁을 거듭한 것과 다르게(심지어 성리학의 종주국인 중국조차도 시대가 바뀜에 따라 양명학, 고증학 같은 새로운 물결이 일었다) 조선은 성리학 외의 대안을 모색하지 못한 채 다른 목소리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며 정체되어 있다가 결국 적절한 때 개혁하지 못하고 끝까지 몰빵해 망한 것 뿐이다.[6]

사실 조선 후기 들어 지나치게 교조화된 후 발생한 병폐가 너무 눈에 띄어서 그렇지, 성리학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던 조선시대 초기의 사회상은 그런 대로 괜찮았던 것도 짚어볼 만하다. 다만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성리학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면이 강했고, 왕도정치보다는 부국강병이 더 중시되었다. 또 세종, 세조 같은 당대 국왕들 역시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활용해 전 왕조 시절 득세했던 불교, 친원파, 여타 기득 세력을 견제하면서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 '이용'했을 뿐, 그 자신들은 내밀히 불교를 숭앙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 조선 초의 부흥은 성리학이 영향을 강하게 끼쳐서라기보다, 오히려 적절한 선에서 성리학과 맺고 끊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교조화된 성리학 체제와 달리 여성들의 권리와 공업, 과학 분야 종사자들도 제법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이 한 일례이다.

사실 극단주의로 치달은 결과 폐단을 야기한 사례는 비단 성리학 뿐만 아니라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타 문명권에서도 흔히 발생한 바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성리학이 본연의 자세를 잃고 부패하면서도 종교개혁 같은 자체적인 대개혁을 이루지는 못했고, 결과적으로 성리학을 신봉한 세력들이 열강의 식민지로 굴러떨어지면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이 성리학의 본질적 문제점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잘못 운용한 이들이 야기한 문제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무슬림 명예 살인이나 여성 할례 강요 같은 걸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가?

종합하면, 비행기는 죄가 없다. 파일럿이 문제지.

3. 성리학에 대한 비판 

본디 석가의 가르침 그 자체만으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불교 고려 말기로 접어들며 점차 부패일로를 겪었고, 역시 예수의 가르침 그 자체만으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개신교가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개독교, 예수쟁이라 불리울 정도로 그 세가 극성을 띄면서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듯, 조선으로 건너와 토착화된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점차 변질을 겪은 사실 자체도 분명히 간과할 수 없다. 즉 학문으로서의 성리학 자체는 문제는 없을지 몰라도, '조선화된 성리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적지 않은 폐해를 야기했으며 이를 무작정 자학사관이라 실드를 칠 수 없는 것 역시도 명약관화하다. 그 어떤 사상이든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며, 성리학도 당연히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 성리학의 성립 배경부터가 금나라라는 (한족 기준) 오랑캐에 밀려난 남송에서 나온 사상이기 때문에 명분론"과 존화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결국 이는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으로 인해 조선을 남송에 빗대게 만들어 소중화가 촉발되었고, 특히 교조화된 종법제의 권위가 합리성마저 넘어서면서 가부장주의, 끼리끼리 문화, 남녀차별, 신분제의 고착, 연좌제 등 불합리한 제도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여 사회의 발전과 인권신장에 악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여파가 남아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당연히 자주적인 사상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한 외래 사상이기 때문에 이걸 두고 딱히 자존감이나 자부심을 갖기도 뭣한 면이 있다. 모시는 성인들 역시 그 정점에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다. 비록 이것이 당시 지정학적으로 조선이 처한 운명적 상황이었음을 고려해야겠지만, 같은 이치에서 역시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외래사상인 기독교 등에 대해 '이건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고유의 사상!'이라고 맞서면서 힘 줄만한 것도 아니다. 단지 받아들인 시기가 몇백년 더 빨랐을 뿐 어차피 자생적인 사상이 아니긴 매한가지다.

게다가 성리학이 유입된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조선의 성리학은 비타협적, 배타적인 면이 두드러졌다. 명나라에서는 비록 성리학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양명학 같은 다른 학문도 존중받으며 공존의 길을 걸었고, 일본에서도 성리학은 말 그대로 '학문'과 '도덕률'이었지 조선처럼 신앙시될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며 당연히 네덜란드에서 유입된 난학 등 다른 학문과 병존하며 다양성을 인정받았지만 조선은 다른 계통의 학문 자체를 사특한 것으로 간주해 탄압하거나 배격하였다. 결국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천주교처럼 박해를 피해 강화도 등지에 은둔하며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19세기 절호의 시기에 다른 사상을 수용하는 개국을 겁내면서 철저한 쇄국으로 치달은 것도 이러한 성리학적 배타성과 무연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전통의 풍수지리, 사후관과 짬뽕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른바 '혼백 공양'이라는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다. 애초에 공자 본인이 "괴력난신은 말하지도 않는다" 하였건만, 전통의 샤머니즘이 성리학과 결합한 조선에서는 유난할 정도로 묫자리에 집착하고 조상의 위령에 집착하며 제사와 관련된 제례까지도 엄청나게 복잡해지는 등 뚜렷한 변질을 보였다. 이 같은 망자에 대한 집착이 한편으로는 해당 씨족 사회를 결집시키는 순기능도 있었으나, 결국 신분제를 고착화하고 허례허식에 자원을 소모하는 역기능이 더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예(禮)'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과정에서 주객이 전도되어 일어난 폐단도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지배층의 대표적 허례허식 사례로 꼽히는 예송논쟁이 비록 그 당시 지배층에게는 의미가 중요했다고 하지만, 이런 논쟁을 지나칠 정도로 '중요하게' 만들어버린 것도 그 토양이 성리학적 체제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당시 왕이었던 현종이 이런 현실에 개탄하며 "차라리 내가 죽어버려 이런 말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현종 3년 3월 23일 조회)라고 자조 어린 한탄을 할 정도였을까? 이는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적 질서가 본연의 정체성을 잃고 헤게모니 다툼으로 변질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더욱이 종법제를 강조하는 성리학 체제의 조선에서 정작 제대로 장자가 왕위를 승계했던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이러다보니 왕위 계승 과정에서는 늘상 잡음이 빚어지고, 어찌어찌 왕위에 올라도 구설수에 오르거나 재위 내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아무리 자질이 있는 계승자라 할지라도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다면 성리학적 질서 하에서 왕 다운 왕 노릇을 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장자가 아닌 계승자는 항상 전대에 소급되는 정통성을 세우려 엄청난 노력을 허비해야 했다. 어느 정도는 왕조국가로서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조선은 그 정도가 심해도 굉장히 심했다. 결국 성리학의 본질적 이념은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는 왕도정치임에도, 실제 조선에 적용된 결과는 대부분 군약신강 아니면 군강신약에 치우쳤다.

고려 때까지 수백년 이상 이어진 전통적 요소들을 적잖이 단절시키거나 이질화시킨 것도 성리학의 부작용 중 하나. 일단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불교 색채가 강한 전통 행사들이 조선시대 들어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장당했으며, 삼국시대부터 어느 정도 이어져 온 풍류적 사조들도 상당량 맥이 끊겼다.

공납의 폐해에 있어서도 성리학이 상당량 오용되었다. 즉 16세기까지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납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어처구니없게도 '구하기 힘든 특산물을 바치는 것 = 왕실에 대한 충성의 발로'라는 괴악한 공식을 대입시켜 이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충(忠)은 성리학 체제인 조선에서 효(孝) 이상으로 중요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공납 폐지론이 자칫하면 충성심 테스트에 결부당하기도 했던 것. 결과적으로 국왕 스스로가 직접 개혁을 주도하지 않는 이상 악습 혁파가 굉장히 힘들었고, 대동법이 첫 도입 후 그나마 정착되기까지도 무려 100년 이상이나 걸렸다. 사실 공납만이 아니라 당대의 제도적 문제들 거진 다 이런 식이었다. 문제는 19세기에 들어서조차 삼정의 문란 등에 따라 백성들 등골은 여전히 휘었다는 사실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계급 역시 성리학 질서가 공고해지면서 더욱 고착화한 면이 있다. 성리학 질서가 강하면 강해질 수록 소위 사대부라 불리는 양반들은 입김이 강해진 반면 상인들은 근본 없는 종자들로 천시되었다. 기술직의 경우는 가장 급이 높은 것조차 중인들이나 맡는 천직으로 간주되며 사대부와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이런 까닭에 조선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문명 수준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도 극도로 화폐경제가 미비했다.

더욱이 이런 양반 집착이 막장으로 치달으면서는 아예 양반 족보를 돈으로 사고 파는 웃지 못할 일까지 일어났으며(공명첩),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종법제가 이처럼 돈(패물류 등 포함)으로 거래되는 시점에서 이미 성리학은 고려 말기의 불교 못잖은 부패상으로 치달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성리학이 목숨처럼 여기던 질서의 근간이 돈에 휘둘리게 된 셈.

일각에서는 성리학 비판을 오로지 일본의 자학사관으로 치부하며 조선 당대에서는 비판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일본이 패망한 후 19세기를 겪었던 50대 이상 원로들에게서조차 배격된 것만 보더라도 이런 물타기는 무리한 감이 있다. 실제로 타국에 일시 점령당하거나 식민 통치를 겪은 나라들 중 이전 체제가 어지간히 멀쩡했던 사례들은 지배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서라도 왕정 체제까지도 복구시킨 경우가 적지 않고, 더구나 일제 지배는 36년에 그쳤으며 해방 직후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김구를 비롯해 경술국치 이전의 시대를 생생하게 경험했던 산 증인들이 즐비하게 생존해 있었다. 그럼에도 해방 후 주요 인사들 중 경술국치 이전을 추억하며 체제 복구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당연히 당대 조선 내부에서도 이런 경직성에 대한 비판은 제기되었다. 단지 정면으로 거역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리기에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 홍길동전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극단적인 종법제를 비판한 것, 양반전 호질에서 예의와 겉치레를 중시하는 위선적인 면을 비꼰 것, 허생전에서 허생이 탁상공론만 일삼는 조정을 꾸짖은 것, 탈춤판에서 말뚝이가 양반을 개에 빗대며 조롱하는 것 등등이 모두 당대 파행을 빚고 있었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과 무관치 않다. 게다가 민족적 봉기인 동학농민운동의 경우는 아예 대놓고 성리학에서 말하는 사문난적 행위(불교와 도교의 적극적 수용)를 하면서 들고 일어났으며, 당연히 동학사상 자체도 봉기 이전부터 반체제적이라며 조정의 철저한 박해 대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발생 초기(관학파 주도)에는 형식주의보다 구습 타파에 일조하면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작용하며 국가를 이끄는데 큰 무리가 없던 사상으로 잘 기능할 수 있었으나, 이후 사림이 주도하여 철저히 교조화한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낡고 형식화된 사상체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 개선하지 못한 성리학자들과 개선되지 못한 채 폐단만 낳던 사상이 비판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래의 아젠다를 잃고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를 비하하는 자학적 역사관과 동일시하며 변질되기 이전의 숭고한 뜻을 구실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변명하는 것은 사상의 발전과 사회의 발달을 부정하는 것이다.

3.1. 고증학의 비판 

청나라 고증학은 주자학에서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많이 태어났지만, 자신의 사상에 근거한 주장이 우선하여 고전 그 자체에 입각한 사실 해석이 아닌 것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 고증학은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이용하여 고전 해석을 하면서, 주자학의 철학적 해석에 대해서 역사주의, 문헌학적 해석에 따라 비판을 하게 된다.

3.2. 소라이 학의 비판 

일본의 학자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을 추측에 근거한 허황된 학설이라고 비판했으며, 주자학과 같은 후세의 해석에 얽메이지 말고 고대 유교 경전을 직접 연구하자는 '고학'을 내세우면서, 주자학은 물론 양명학과도 다른 독자적인 해석을 내세웠다. 소라이는 유학은 기본적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의 방법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이나 도덕관념과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견지에서 해석을 하였다.

하지만 소라이 학은 이 때문에 유학이 지니는 도덕적 기능을 파괴하고, 위선을 정당화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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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본성=리, 감정=기.
  • [2] 혹은 또 다른 학문으로 재탄생된다. 이이와 이황의 추종자들은 이이와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보는데, 이건 순수하게 한국 유학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주론까지 나가는 개념은 원래 주희의 성리학에는 없던 개념이다. 때문에 해동성리학이나 조선성리학으로 별도로 분류할 필요까지 있다.
  • [3] 당장 유럽만 가도 중세 암흑시대를 이룩한 만악의 근원으로 가톨릭이 일점사를 당하고 있다.
  • [4] 민주주의공화국을 자칭하는 윗동네의 모습을 생각해보자.비슷한 예로, 남녀평등을 위해 일한다고 자칭하는 우리나라의 어떤 기관도 있다.
  • [5] 호주제는 일제시대에 생긴 제도지 조선시대 제도도 아니다.
  • [6] 현대 문명을 선도하는 구미의 백인 문명권의 경우, 그들은 내부적 논리로써 가부장적 종법질서를 스스로 깨뜨리는 것에 성공한 적이 있다. 즉 성리학의 취약점은 '질서'를 워낙 중시하다보니 질서에 도전하는 것들을 철저히 배척함으로써 내부적인 변화와 개혁이 극히 어렵고 아예 서학으로 불리던 기독교로 갈아타거나 유교 테두리 내에서 점진적으로 손질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