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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가나다順)/기독교 바로알기

성령의 은사들 <고린도전서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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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동안 미국에서 활동하시던 류기종 박사님의 글을 한국에 나오셨을 때에.... 당당뉴스에 기고하신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류박사님은 그동안 많은 연구와.... 조예가 깊으신 분의 글을 싣게 되어 감사를 드리고 이 지면을 통해 이 영성적 신앙을 널리 알려야 되겠다는 앞선 생각에 먼저 싣게  되었음을 깊으신 혜량으로 양해를 먼저 구합니다. 제가 미국에 들어가서 정중히 아뢰고 또 허락을 받을 것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성령의 은사들 <고린도전서 12:1-11>

 

우리가 신앙을 갖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기적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있고,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는 현상이 있음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상식과 과학으로만 굴러간다고 하면 세상은 퍽퍽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그대로 있고, 병든 자는 죽어야 하고, 힘 있는 자가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런 세상은 소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룻밤에 그 인생이 역전되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감동하며, 단 순간에 그 신분을 뒤집는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에 열광을 합니다. 다 기적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도 1%도 안 되는 확률일지라도 그 희망을 믿고 삽니다. 그것이 기적을 믿는 신앙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성령 은사의 긍정과 부정 

성경은 기적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적의 힘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바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100세 된 아브라함과 90세 된 사라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나는 기적을 일으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홍해의 거친 물살을 가르고 마치 육지처럼 그 위를 걷게 하심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에 불과한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10:12) 하고 명령하니 태양과 달이 그 자리에 멈추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또한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며, 눈먼 자를 보게 하며,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바다 위를 육지처럼 걸으셨으며 떡 덩어리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주요하게는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선교과정을 다룬 사도행전도 온갖 기적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 또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심지어 베드로의 그림자를 스치기만 하여도 병이 나을 것을 기대할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하며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1:5)라 말씀합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어떤 기적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성령의 임재나 은사와 같은 기적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임재를 교회와 개인이 구원받은 근거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성령 안에서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오늘 읽은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 입니다. 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나타남은 성령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병 고침을 받고 능력을 행하고 황홀경에 빠져 방언을 말하는 모든 현상이 곧 성령의 나타나심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첫째는 성령의 이런 초월적 역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만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을 유령을 보았거나 제자들이 헛것을 본 것처럼 설명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어린 아이가 작은 도시락을 내어놓자 모든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숨겨두었던 자기 도시락을 내어놓았고 그렇게 나누어 먹자 오히려 남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의 부활이란 것 또한 부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기적을 인정하는 성경 자체를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도 사라지고 남는 것은 편협한 이스라엘 민족사와 윤리만 남을 것입니다. 

결국 이성을 무기로 하고 있는 학문적 방법론으로는 성경을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기적이라는 문제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성경에 대해서 비역사과학적 역사라는 참 난해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라는 무대에 떨어지지만 그것은 일반 학문적 방법론으로는 규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살면서도 오늘도 우리는 기적과 신화들로 가득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잘못되었습니까? 기적들은 빼고 가려서 읽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기적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줍니다. 땅에 코를 박고 사는 우리로 하늘을 보게 만듭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1%의 희망을 보며 살아가게 만듭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그 힘을 발휘하고 있고, 발휘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반대 극단에는 지나치게 초월적 은사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기적이나 영적 현상으로만 설명하려는 오류입니다. 예컨대 성령의 은사중 병 고치는 은사를 생각해봅시다. 현대에도 성령님께서 병 고침의 은사를 은사자들에게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병을 하나님의 은사로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병원에서 약이나 수술을 통해서 병이 낫는 것은 믿음이 작은 것이고, 기적을 통해서만 나아야 제대로 된 믿음이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오해한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병원의 치료를 거부하고 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버티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이런 예화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어느 마을에 홍수가 났습니다. 믿음이 좋은 한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이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증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물이 차서 지붕에 올라가서는 이 청년이 바다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듯이 자신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마침 구명정이 와서 이 청년 보고 위험하니 빨리 배에 타라고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하며 거부하였습니다. 이제 물이 목까지 찼습니다. 이번에는 헬리콥터가 날아와서 밧줄을 던지며 빨리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이것도 거부했습니다. 할 수 없어 구명 튜브를 던져놓고 갔지만 청년은 이마저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청년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화가 나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위기의 순간에 있을 때 어찌하여 저를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니다. 나는 너의 도움의 소리를 듣고 구명정을 보냈지만 네가 거부했다. 헬리콥터를 보내고, 마지막에 구명튜브마저 던졌지만 너는 거부하였다.” 하나님을 우리를 도우실 때 다양한 방식으로 도우십니다. 이성적인 방식과 사람을 통한 방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사실 고대 사회에서 병을 치료하는 주된 역할은 의사들만이 담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이나 신전의 사제들이 의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헬라 사회에서 치료의 신으로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있습니다. 그 상징은 뱀인데 지금도 군의관들의 마크에는 뱀이 나무 막대기를 휘감고 있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피다우로스 신전의 비석에는 알케다스라는 사람의 고백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장님이었는데 신전에서 기적적인 은혜가 임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이 멀었는데 꿈에 환상을 보았다. 신이 그에게 와서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그가 맨 처음 본 것은 신전에 서 있는 나무들이었다. 새벽에 그는 고침을 받고 돌아갔다.” 

중세교회도 야고보서 514절 말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는 말씀을 따라서 병자의 몸에 기름을 부어 치료하는 성유식을 거행을 하였습니다. 이 성유식이 9세기에 이르러 죽음 준비하는 종유식으로 바뀌었습니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육체적 질병은 이제 병원과 의사의 담당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따른다면 의사들은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대에 옛날처럼 병 고침의 은사를 교회에서 구하는 것은 지나친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현대의학도 어쩔 수 없는 분야는 우리는 하나님께 매어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기도로 고치나 의술로 고치나 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들이 걸린 병의 대부분은 의사가 고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의사도 손댈 수 없는 병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또 은사주의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모든 초월적 역사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은사라는 신비적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대표적으로 방언의 은사가 10절에 나옵니다. 방언의 은사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방언을 하시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저 또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즐겨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모든 방언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닙니다. 듣기로는 불교나 이슬람교 등 이교도에서도 방언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탄 또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4). 오늘 읽은 말씀 2절에서는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말씀합니다.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우상종교의 교리를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기서 나타나는 어떤 초월적인 현상에 매료되거나 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당이 마치 자기가 믿는 신을 떠나지 못하고 그 신에 매여 사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초월적 현상이 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초월적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초월적 현상을 통하여 드러나는 그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님 되심이 드러나고,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주님 되심의 고백과 찬양이 우러날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 나가지만 예수를 저주하거나 자기가 높아지면 악령의 역사입니다. 요한일서 41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국교회에는 병을 고치거나 기적적인 능력을 행했던 은사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 결국 이단으로 빠지고, 탐욕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았습니까? 초월적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 내용입니다. 

성령 은사의 유익함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에도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셨지만 오늘날에도 부어주시길 원하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 신앙생활에도 유익하고 교회에도 유익합니다. 유익하다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간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방언의 은사가 그렇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면 우리는 더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청년 시절 저는 껌을 씹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를 받고 난 후에는 껌 씹는 것을 버렸습니다. 걸어 다니면서도 한동안은 방언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들은 방언 통역의 은사가 주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으면 우리 기도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 또한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14:13)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병 고침의 은사는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현재도 이런 치유사역을 하고 계신 분들이 곳곳에 있고 그와 관련된 책들도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16:17-18)고 말씀합니다. 병자나 자신이 병에 걸렸을 때 먼저 그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병이 낫고 안 낫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바이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권리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영분별의 은사 또한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권세나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 영분별의 은사는 하나님의 영과 악한 영을 구분하고,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하고, 그 안에 도사린 악이나 상처가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적이나 문제를 정확히 알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예언의 은사는 제가 받고 싶어 하는 은사 중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14:3) 예언의 은사는 무당처럼 이런 사업을 하라, 어느 대학에 합격할 것이라며 미래 일을 점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위로하여 힘을 주고 가야 할 바를 제시하는 은사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했던 일들이 바로 이런 일이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미래 일을 밝히는 것은 작은 것이었고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밝히기 위한 수단의 일부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리더들에게는 또한 지혜의 은사나 지식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주변에 보면 지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리분별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꼬인 문제를 잘 풀어가는 사람입니다. 솔로몬과 다니엘 같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19:7-8)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장로(長老)는 원래 나이든 사람을 뜻했습니다. 나이든 사람이 지혜롭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서든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생 연륜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지식의 은사가 확실히 무엇인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감추어진 비밀한 것들을 알아내는 은사라고 합니다. 다니엘이나 선지자들이 이런 지식의 은사가 탁월했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지식의 은사가 말씀을 잘 해석하고 풀이하는 은사라 합니다. 이런 지식의 은사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는 아마 귀신축출이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미개척 전도 현장에서는 능력 행함의 은사는 탁월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라는 것도 필요합니다. 여기 말하는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고전13:2)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을 이것을 믿어지는 은사라 하였습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강력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집니다. 이런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적은 우리로 겸손하게 만듭니다. 19세기의 블룸하르트 목사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19세기는 독일에 자유주의가 판을 칠 때였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교만한 시대였습니다. 그때 블룸하르트 목사는 시골 목회지에서 고트리빈 디투스라는 소녀에게 임한 악령을 쫓기에 고투를 벌였습니다. 1년여의 투쟁 끝에 소녀의 몸에서 귀신이 떠났습니다. 그때 귀신에게서 해방된 소녀가 예수는 승리자다!” 하며 외쳤습니다. 

이후 예수는 승리자!”가 블룸하르트의 목회의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치유사역과 사회 개혁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블룸하르트의 영향력은 나중에 사회개혁가의 길을 간 자기 아들 블룸하르트와 칼 바르트 등에게 미칩니다. 그들을 통해서 자유주의가 극복이 되고 신정통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신정통주의의의 슬로건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으니 모든 인생은 그 앞에 잠잠하라”(5:2)였습니다. 기적은 이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며 인간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우리 교회에도 성령의 은사가 풍성히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하고 우리 교회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덕을 세우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우리가 달라고 한다고 하여 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11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린도 교회에서 최고의 은사는 무엇이었을까요?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황홀경 가운데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고 그것이 가장 최고의 은사로 사람들에게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은사 리스트에서 방언과 관련된 은사를 일부러 가장 뒤에 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13장의 그 유명한 사랑장에 대한 말씀을 하는 이유도 다 은사의 우열을 따지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1-2)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도 방언은 방언 통역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하고,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더 힘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의 은사는 자기에게만 유익이 되지만 방언이 통역이 되고 예언이 선포될 때는 다른 사람이나 교회에 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은사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만약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여 또는 교회를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신 은사대로 감사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전혀 은사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소망을 갖지 말아야 하는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141절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1412절에서는 신령한 것이 더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구하고 찾고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구하는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가장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가장 최선은 성령입니다(11:13).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되고, 우리 교회가 성령의 은사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입력 : 20110803() 08:07:25 / 최종편집 : 20110803() 10:43:47 이종철urpast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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