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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일 역사바로잡기

◆ '독도의 진실'이 나왔다... ◆ 이제 일(日)도 인정할 수밖에 - [헤럴드경제=이혜미기자]/두산백과/유항버들/ [서울신문]홍희경 이민영기자/白 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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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의 진실'이 나왔다... ◆

이제 일()도 인정할 수밖에

[헤럴드경제=이혜미기자]/두산백과/유항버들/

[서울신문]홍희경 이민영기자/白 雲 



"知彼知己,百戰百勝,不敗!" "必死卽生,必生卽死!" 

이 공유는 저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下記作成者의글=共有出處告知]


[1] ‘독도의 진실’ 나왔다…이제 日도 인정할수밖에?

[헤럴드경제=이혜미기자] ‘독도의 진실’을 담은 영상에 누리꾼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최근 독도 전문 사이트 ‘독도의 진실’(www.truthofdokdo.com)에는 ‘일본 지도에 독도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3분19초 분량의 영상이 공개됐다. 

[출처] http://youtu.be/_8EZW5WHAG4

해당 영상은 과거 일본정부가 제작한 공식지도에 독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8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일본의 공식지도였던 ‘교키도’에는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포르투갈의 서양 지도기법을 도입한 ‘포르트’라는 17세기 지도에도 독도를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1612년 에도막부가 제작한 일본 최초의 공식지도 ‘케이초일본도’를 포함해 1655년 ‘쇼호일본지도’, 1702년 ‘겐로쿠일본지도’, 1717년 ‘교호일본지도’, 1821년 ‘대일본연해여지전도’, 1877년 일본육군참모국이 작성한 ‘대일본전도’에도 독도는 없었다. 

한편, 1894년 일본이 만든 ‘신찬 조선국전도’에는 독도가 한반도와 같은 색으로 표시돼 있어 일본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영상의 말미에는 “일본은 오랫동안 독도를 한국영토로 그려왔고, 일본지도에선 제외해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했다”는 자막이 등장한다. 


독도의 진실은 이 영상 외에도 ‘한국 고지도, 우산도는 독도’, ‘일본 고문서에서의 독도’, ‘1905년 일본 독도 편입은 무표’ ‘샌프란시스코 조약, 독도는 한국’, ‘미국의 러스크서한은 무효’ 등을 통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성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이 사이트는 가수 김장훈 씨가 구성에 참여하고 제작비를 지원했으며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자료 정리와 감수를 맡았다. 또 김장훈과 콤비로 한국 홍보를 펼치고 있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팀이 웹사이트 제작과 구축을 담당했다. ham@heraldcorp.com


독도[ Dokdo, 獨島 ]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있는 섬.

위  치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 번지 

경위도 : 동도(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 서도(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

면  적 : 187,554㎡(동도 73,297㎡, 서도 88,740㎡, 부속도 25,517㎡)

독섬이라고도 하며, 면적은 18만 7,554㎡이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8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서도는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에 위치한다. 동도·서도간 거리는 151m로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6m, 면적 73,297㎡이고, 서도는 해발고도 168.5m, 면적 88,740㎡이다.


1. 삼국사기에는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술라주의 군주 이사부가 울릉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왕국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독도가 우산도(于山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과 무릉 두섬은 날씨가 맑은 날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71년 삼봉도(三峰島)와 1794년 가지도(可支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울릉도를 울도군이라 칭하고 울릉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하도록 정하였는데, 석도는 '돌로 된 섬'이라는 뜻의 '돌섬'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전라도 방언에서는 '돌'을 '독'이라 하여 전라도 남해안 출신의 울릉도 초기 이주민들은 '돌섬'을 '독섬'이라 불렀으며,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獨島)'가 되었다고 한다. 독도가 행정지명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이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로 알려져 있다.


2. 한편, 프랑스와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Liancourt)', '호네스트(Hornest)'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1905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바꾸고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한 뒤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한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2005년 3월 16일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로 정하는 조례안 가결했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같은해 3월 17일 일반인에게 독도 방문을 전면 허용하고 대일(對日) 신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출처] 독도 | 두산백과


3. 왜 독도는 우리땅인가?(알고 주장합시다) 눈감고 세상보기


by 유항버들 wowna.egloos.com

독도가 왜 우리땅인지 알고 외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잘 몰라서 이번 기회에 찾아보았습니다.

단순히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만 부르지 않을까 싶네요


  1) 우리 측


 ▶ 삼국사기(1145년 편찬) :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가 우산국(을릉도)를 정복해 신

     라에 귀속시켰음" 기록

 ▶ 고려사 (1414년 편찬) : "고려 의종 때 김유립이 을릉도를 현지 답사함" 이것은 실제 이

     쪽 부근이 우리 땅임을 입증시킴

 ▶ 세종실록지리지(1432년 편찬) : "우산(독도)과 무릉(을릉도)의 두섬은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고 두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볼수 있도" 라고 

     표기

 ▶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 독도 기술

 ▶ 성종실록, 숙종실록, 동국문헌 : 독도 기술

 ▶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부들에게 월경을 금지시킴(1699년 외교문서)

 ▶ 삼국통람도설(1785 일본 하야시 시헤이 편찬) : 독도는 조선땅이라 것을 표시

 ▶ 도성팔도지도(18세기) : 울진에서 바람을 얻으면 이틀 뒤에 도착 한다라고 표기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표기

 ▶ 샌프란시스 강화조약(1951) : 일본은 한국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을릉도, 거문도를 

     포함한 모든것에 대해서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함.

 ▶ 연합국 최고사령부(1946년) :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 기록


  2) 일본 측


 ▶ 도쿠가와 막부 시절 어업가문을 통해서 다케시마(그당시는 을릉도)를 지배 했슴을 표

     기

     - 도해면허(어업면허 1618년), 마쓰시마(도해면허 수여 : 1696년)주었다고 함.

        여기서 알아야 할것은 도해면허는 외국으로 나가 고기를 잡을 때 막부에서 허가권으

        로 주는 것임 

        그 당시 일본의 배가 그쪽에서 고기를 잡아 분쟁이 많이 일어났으며 그에 따라 조선

        에서는 을릉도와 독도에 주민을 철수시키는 정책을 핌

 ▶ 일제 강령기에 국토 침탈로 인하여 일본 어업을 독도를 포함한 을릉도까지 와서 어업 

     성행

 ▶ 시마네현 고시 (1905년) : 독도는 주인없는 땅이기에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

     한다고 고시

     - 당시 일본은 한국 영토임을 알았기 때문에 일본인이 없는 곳이라고 통도

 ▶ 한일어업혀정공동관리수역(1999년) 일본의 영토임을 한국이 인정했다고 시마네현 주

     장 

     - 이것을 빌미로 시마네현 다케시마의 날 제정

     - 하지만 이 협정은 당시 EEZ(배타적 경제수역)에 관해 분쟁을 하지 않고자 이루어진 

        조약으로 영토 문제와는 별개였음


사실 돌아보면 일본이 독도를 자기의 날이라고 우기는 이유는 일제강정기를 침탈로 보지 않는 속성이 크다. 다시 말해 일본강정기에 이루어진 모든 행동들이 합법적이였고 당싱 조선, 대한제국이 자의에 의해서 해주었다는 것이다. 


일본측은 16세기 까지 고문서에서 독도관련 문건은 찾아볼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기는것에 대한 가장 큰 이유인것인다.


이것은 여기서 우리는 독도를 그저 하나의 섬 이상으로 볼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국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아직까지 일본은 한국을 조센징이라하며 자기의 속국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있다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2] 한ㆍ일 100년 대기획<12> - 청산되지 않은 과거[서울신문]


1.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에서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이다. 미래의 100년을 위한 동반자적 양국 관계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우호 증진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광복과 종전 65년이 지났지만 일본은 여전히 이를 두고 도발적인 책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이 같은 반역사적 도발은 한·일 양국의 미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로 작용한다. 


2. 독도는 우리 땅이고, 


대한민국은 고조선 이래로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온 자주 국가이다. 이것이 한국인이 갖는 영토 개념이고, 역사 인식이다. 일본의 정권이나 시민단체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무시하며 도발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일제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우리가 이미 갖고 있고 역사 문제는 내정의 측면이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을 분쟁지역으로 두드러지게 만드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며 ‘조용한 외교’를 주장한 학자들이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그만큼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는 국가적 자존심을 흔드는 문제였다.


3. 그런데 2001년 4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왜곡된 역사교과서가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하고 2005년 3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한 뒤 세월이 흐르면서 두 문제를 푸는 방식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독도 문제는 현대 국가의 근간인 ‘영토’ 개념을 침범한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되지만, 역사교과서 문제는 왜곡행위를 바로잡는 한편으로 양국이 대립이 아닌 화해를 모색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 그래서 양국은 


2002년 3월 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세웠고, 2007년 6월 2기 위원회를 운영했다. 이 위원회는 24일 최종보고서를 낼 계획이지만, 아직까지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는 방안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3기 위원회가 설립된다면 궁극적으로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관측된다. 


5. 왜곡된 내용을 담은 후


소샤와 지유샤 역사교과서를 채택한 비율은 지난해 1.71%로 미미하지만, 2001년 0.039%에서 2005년 0.39% 등으로 증가세다. 새역모 등의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6. 새역모는 지난해 4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내놓은 데 이어 다음달 초등학교 역사 과목 격인 사회교과서 검정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사회교과서가 시중에 유통되는 즉시 분석작업을 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 안에 관련 팀을 꾸렸다.


일본이 간헐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과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내놓고, 한국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모습은 곧잘 독일의 전후처리 문제와 비교된다. 


전후 패전국인 독일은 나서서 사과를 하고, 프랑스나 폴란드 등 주변국가와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놓았다. 반면 한·일 관계에서 화해의 손짓을 먼저 내미는 쪽은 피해국인 한국이다. 


한국은 1998년 일본문화 개방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최근 양국의 동반자적 관계 설정에 적극적인 것도 우리 측이다. 때때로 한국 측 대일 협상 대상자를 상대로 ‘지일’(知日)이라든지 ‘친일’(親日) 논란이 나올 정도이다.


7. 동북아역사재단 이명찬 연구위원은 


“역사문제는 존재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2차세계대전의 전범과 이후의 경제성장을 이룬 원로층이 동일인인 일본의 특수한 상황에서 이들의 후손인 일본 지도층이 ‘주인공이 되지 못했거나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한 역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조부를 욕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한 사실을 깨닫고 평생 자기부정을 하며 떠돌게 된 것처럼, 아직도 ‘천황’체제를 유지시키고 있는 일본이 스스로의 죄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8. 이런 일본의 집단의식은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무관심에서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일본의 가와바타 다쓰오 문부과학상이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하는 등 최근까지 일본 관료들의 망언이 이어질 때마다 한국인들이 규탄하는 반면, 일본인들 중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는 소수이다. 전후 미국 중심의 외교관계에만 치중해 온 일본의 특징이자 한계로 지적되는 현상이다.


9. 지금까지는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망언에 대해 적절한 대응기술을 습득했다는 평가이다.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독도 망언에 대해서는 전 국민적인 반발로 대처하는 모습이 매뉴얼처럼 내면화되어 있다. 그래서 독도는 여전히 우리 땅이고, 우리는 여전히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남았다.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에 대해 한층 더 단호하고 발전적인 대응이 필요한 이유는 이 문제들이 한·일 간에 청산되지 않은 부분 자체일 뿐 아니라 이 문제들로 인해 많은 숙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 일제 강제징용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일본의 헌법개정과 재무장 문제가 모두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에서 비롯된다. [서울신문] 홍희경 이민영 기자 saloo@seoul.co.kr


[3] 국제법적으로 독도는 왜 우리땅인가?

白 雲 http://cafe.daum.net/jinin22/670Z/3062


국제법적으로 독도는 카이로 선언에 따라 침략전쟁 기간중 빼앗긴 땅을 되찾은 것이며, 해방이후 연합국에서 맥아더라인으로 한반도의 부속도서로서 통치해 오다가,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미 군정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수받은 것입니다.

    - 1943년의 카이로선언에 따라, 침략전쟁 기간중(1905년)에 강탈당한 땅을 되찾은 것

    - 1946년 맥아더라인으로 독도를 일본에서 제외, 한반도에 포함

    ⇒1948년 대한민국 건국시 미 군정으로 부터 한반도와 함께 합법적으로 독도 인수


1. 침략전쟁으로 빼앗긴 땅을 되찾은 것

독도는 일본군에 의한 한반도 무력점령 기간중에 강탈 당한 땅입니다. 따라서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당연히 한국에 반환되어야 합니다.


  1943.11 카이로 선언: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축출되어야.

  1945. 8.15 일본, 연합국에 항복

  1945. 9. 2 항복문서 조인,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 무조건 수락

                                           ∇

  청일전쟁이후에 빼앗긴 독도는 카이로선언에 따라 반환되어야 함.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와 대신을 협박하여,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군의 한반   

  도 점령기간중에 강탈해간 땅이 바로 독도입니다.


2. 살인 협박 강탈의 역사


 1876 강화도조약: 일본인 치외법권,무관세,측량 허용

 1894 청일전쟁중 일본군 경복궁침입, 국왕 왕후 감금

 1895 밤중에 궁궐난입 왕후를 잔혹하게 시해(을미사변)

         당시 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 "천인공노할 만행"

 1896 6개월간 감금상태 국왕, 궁녀가마 타고 탈출(아관파천)

 1904.2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서울 점령, 황제 大臣 협박

           일본인 고문관, 재무 외교 경찰권 장악(제1차한일협약)

 1905.2 시마네현 지적에 독도등재, 지방신문에 몰래 고시

 1905.11 대한제국 황제 大臣 협박, 외교권박탈

            통감부설치 국정장악, 사실상 식민통치(을사조약) 

 1910. 8 한일합방, 전국토 강탈

 1910~11 조선총독부 취조국, 조직적 대대적인 역사말살

              고문헌 20만권 약탈 소각


 3.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맥아더라인 계승


1948년 2차대전 종전 이후 패전국 일본을 통치하던 연합국최고사령부는 2번이나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nstruction Notes, SCAPIN)을 선포하여,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시키고(SCAPIN 제677호), 독도 12해리 이내 일본어선의 접근을 금지(SCAPIN 제1033호)했습니다.

독도는 해방이후 연합국최고사령부에 의해 한반도의 부속도서로서 통치되던 섬으로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미군정으로 부터 합법적으로 인수받은 것입니다. 

   1946. 1. 29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SCAPIN 제677호 - 독도를 일본에서 제외, 한반도

       에 포함

   1946. 6. 22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SCAPIN 제1033호 - 독도 12해리 이내 일본어선 접

       근금지, 맥아더라인 설정

   1948. 8. 15 대한민국 건국, 정부수립 - 독도를 한반도와 함께 미군정으로부터 합법적으

       로 인수 


[참고] http://goo.gl/toIiP

[참고] http://goo.gl/GeWSc

[참고] http://goo.gl/TsU4j

[참고] http://goo.gl/EBP4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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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블로그(지구촌한마음운동)의 의견과 다를 수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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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wonemind.tistory.com/393, http://goo.gl/vy0y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