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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衛(金相球)-지나온 발자취/金大衛(金相球) 誕生背景

名家의 傳統 잇는 善山(一善) 金氏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 종  훈 *

조상의 德을 따르자.

조상의 業을 가꾸자.

조상의 얼을 

자손만대에 이어나가자.


名家의 傳統 잇는 善山(一善) 金氏


 善山(一善) 金氏 

뿌리 찾기에

즈음한 공적에 대한

학술적 발표문 요지 

 

다음은 善山(一善) 金氏 점필제파 세거지 및 기록에 즈음한 언선(이재) 할아버지의 기록입니다. 

 

1. 시조 김선궁

충공이 말년에 관직을 떠나 고향 선산에 낙향하시어 정착하셨는데, 지금도 비봉산(飛鳳山) 아래 봉하루 (鳳下樓)터와 군민이 공의 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향화를 올렸다는 진민사(鎭民祠) 터가 있고, 선산 김씨 유허비각(善山金氏遺墟碑閣)이 있어 천년이 지난 지금도 후진들의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시조 순충공의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慶北 龜尾市 海平面 金湖里 彌石山)에 모시었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를 지낸다.

 

그 후 후손들이 번창하여 고려조를 지키려고 충절을 지킨 두 충신(二忠),  충개공 김제(忠介公 金濟), 충정공 김주(忠貞公 金澍)와 조선조의 훌륭한 다섯 선비이신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문정공 김효정(文靖公 金孝貞), 성리학의 맥을 이은 문강공 김숙자(文康公 金叔滋), 사림파의 종주로 성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문충공 김종직(文忠公 金宗直), 중종 때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낸 문대공 김응기(文戴公 金應箕), 명종, 선조 때 東人의 영수이신 김효원(金孝元), 호조판서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로 일본을 다녀와 <해사록>을 남기시고 <반계수록>을 저술한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의 스승인 문강공 김세렴(文康公 金世濂)을 배출한 집안이다.

 

우리 문중은 백암파(白巖派), 농암파(籠巖派), 문대공파(文戴公派), 간의공파(諫議公派), 화의군파(和義君派), 낭장공파(郎將公派), 취수공파(醉睡公派), 송천공파(松川公派), 성암파(省庵派), 소암파(素庵派), 곤육재파(困六齋派), 대장군파(大將軍派), 우윤공파(右尹公派), 양양공파(良襄公派), 정조공 파(正朝公派), 강호파(江湖派), 과당공파(苽堂公派), 점필재파(佔畢齋派)의 18개 분파로 나뉘어 전하고 있다.

▲점필제 할아버지 생가터 (종직)

 

세월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분파되어 지금에 이르렀지만, 우리 문중은 순수한 혈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문중의 모든 구성원이 위로는 조상의 빛나고 명예로운 업적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종족 간에 서로 화목하고 상부상조하며 지내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 이재선생 사적비 건립의 의의 - 김동기(전 건양대 부총장) 

조상의 업적을 오래 사모하고 기리며 그 정신을 오늘날에도 재현하려 노력하는 일은 모든 자손된 자들의 책임이자 당위이다.

우리의 조상은 단지 역사 속에 있는 인물로서의 위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도 조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 가장 절실하고 의미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종교나 문화 집단에서 효를 가르치고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이렇게 보면 효는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가장 소중한 덕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지구상에서 효의 원형을 지키고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효를 실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오늘의 행사처럼 조상의 사적을 석물에 새기어 영구하게 전하고자 하는 사업은 효도 중에서도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선산(善山) 김문(金門)은 대한민국의 어느 성씨 못지않게 유서 깊은 전통을 갖고 있으며, 조상들의 혁혁한 공로와 업적을 보유하고 있는 가문이다.

 

우리의 조상들 중에는 나라에는 충신이었으며 가정에 돌아와서는 효자였고, 남을 위하여 살신성인하는 덕행을 실천한 분들을 일일이 손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리고 학문과 교육에서는 굴지의 학자와 사상가를 배출한 명문이라 자부하는 바이다.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점필제파(언선 이재공의 후손) 세거지 이재공(怡齋公) 언(彦)자 선(善)자께서는 나라에 대한 지극한 충성과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신 공로와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행위가 당시의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분이시다. 공은 18파 중에서도 점필재파에 속하신 분인데 공의 후손들은 공으로부터 이재공파로 분파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의 행적을 소상하게 정리한 사적비의 내용을 여기에 옮겨 본다.

 

3. 怡齋公 事蹟碑

 

우리 선산 김문(善山金門)은 수많은 학자와 충신을 배출한 해동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시조는 순충공(順忠公) 휘 선궁(宣弓)이신데 고려 태조를 도와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다.

17세손 문충공(文忠公) 휘 종직(宗直)은 조선 도학의 연원이며 종장이시다. 이 분의 현손이 언선(彦善)이신데 자는 도현(道賢)이며, 호는 이재(怡齋)이시다. 부의 휘는 을령(乙齡)이고 모는 완산 이씨이시다. 조부의 휘는 유(紐)인데 세마 벼슬을 지냈고 호는 박재(璞齋)이며 증조의 휘는 숭년(崇年)인데 음서로 집경전의 참봉을 지냈다.

무오사화 이후로 가문이 크게 핍박을 받게 되자 벼슬길에 뜻을 접고 강호에 은거하여 조상의 문장과 덕행을 온전히 계승하면서 충효와 신의로 가학의 전통을 이었다.


4. 이재공은 1572(宣祖5 壬申)년 8월 25일 진산 영통리에서 태어나셨다.


공은 천품이 순수하고 자질이 총민하여 보는 사람마다 크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15세가 되어서는 인품과 용모가 한 몸에 오롯이 갖추어져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감히 공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자연히 머리를 숙여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6세에 부모를 잃고 가세가 더욱 어려워지자 개연히 집을 떠나 천하를 주유하면서 세상을 구제할 큰 뜻을 품으셨다.


5. 16세 때에 한강나루를 건너는데 백미를 가득 실은 큰 배가 있었다.


마침 새로 돛대를 교체하는데 그 높이가 9길이나 되어 여럿이 힘을 모아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이 시절은 극심한 흉년이 거듭되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들은 물품이 집결되는 한강변에 모여 식량을 구하고자 애태우고 있었다. 공은 이 백성들을 측은히 여겨 구휼하고자 마음을 정하고, 선원들에게 백미 한 섬을 지고 돛대 끝에 올라가면 백미 10섬을 주겠는가라고 물었다. 선원들조차 맨 몸으로도 돛대 끝에 오르기가 어려운 일인데 공이 이렇게 제안하자 그 의기에 감복하여 허락하였다. 이에 공이 백미 한 섬을 지고 나는 듯이 돛대 끝까지 오르내리는데 마치 평지를 밟듯 하였다.


6. 구경하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약속대로 백미 10섬을 받은 공은 그 자리에서 유랑민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자신은 빈 몸으로 양팔을 휘저으면서 떠났다.

 

이처럼 공의 포부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바가 있었다. 공이 나이 18세에 김해 김씨 세준(世俊)의 따님에게 장가 들었는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재산이 풍요로워졌다.

그 때에 고을마다 관리들의 정사가 문란해져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이웃의 어려움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공은 재물과 곡식을 다 흩어 고을 백성들을 도우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덕을 베풀고서도 갚음을 구하지 아니하니 그 높은 기상과 범접할 수 없는 풍모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함이 마치 송덕비를 세운 것 같았다.

 

20세가 되던 해(1592, 壬辰)에 왜적들이 변란을 일으키자 공은 오직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리를 앞세우는 심정으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백의종군하여 신립장군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달천의 배수진이 실패하여 우리 군사들이 궁지에 몰리고 장군 정발(鄭撥)과 연평군 이귀(李貴)가 포위되었다.

공이 크게 노여워하여 60근 철퇴를 휘두르며 적군 깊숙이 돌진하여 한편으로 수백 명의 왜군을 도륙하고 한편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정발 장군과 연평군 이귀를 양쪽 옆구리에 하나씩 부축하여 달천강을 건넜다.


7. 이 사실이 임금에까지 알려지고 이때부터 장군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임진년에서부터 정유년까지 6년간 왜적과 싸우면서 한번도 선봉을 내 준 적이 없다. 이렇게 용맹무쌍한 공을 보고 신립 장군은 공이 이르는 곳에는 왜놈 우두머리가 풍채를 바라보기만 해도 담력을 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라고 하였으며 군사와 관리들이 의리에 감동하고 충성을 본받았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난리가 평정되어 조정에서 관직을 하사하려 하였으나 왜란을 무사히 평정한 것은 나라의 복이요, 전쟁에서 이긴 것은 오직 백성과 장군들의 공이라고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임금이 공의 겸양지덕을 크게 칭송하시며 창의공신과 예조참판에 친히 임명하였으나 굳게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이처럼 공의 사심 없는 애국충정을 보고 사람들이 근세에 보기 드문 영웅이라고 모두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광해군의 정치가 올바르게 시행되지 못함을 걱정하던 뜻있는 인사들이 의기투합하여 잘못되어가는 역사를 바로잡고자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거사의 대표자는 김류, 원두표, 이귀 등이었는데 하루는 밀실에서 공을 청하여 반정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공이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을 권하기도 진실로 어렵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는데 권하지 않는 것도 또한 어려웁도다.

그러나 이렇게 국운의 중간에 막힘을 당하여 마땅히 중흥시킬 밝은 임금이 계시다면 또한 참된 충신이 없지 않을 것이니 여러 공들께서는 붉은 정성을 다할 따름이라.

내가 비록 노쇠하지만 만약 일에 임하여 급하게 되면 마땅히 만에 하나라도 정성과 힘을 다할 것이라고 하였다.

 

각자의 소임을 분담하였는데 장군께서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창덕궁 정문을 통하여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에 이르러 모든 공신에게 약속하기를 일이 이루어지면 곧 군사를 모으는 나팔 소리가 대궐 안에서 울릴 것이고 또한 불빛이 비칠 것이니, 이것으로써 증거를 삼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기필코 화를 피하지 못하고 마땅히 다 죽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 밤중에 의병들이 대궐 문에 이르러 보니 굳게 잠기어서 들어가지 못하여 일을 장차 헤아릴 수가 없게 되자 군사들이 당황하였다.

공이 주저없이 소매 속에서 큰 도끼 하나를 꺼내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그 위태로움에 임하여 급박한 때에 신통한 계교와 기묘한 꾀가 매번 사람들의 의표를 뛰어넘었다.

대궐 문안으로 들어가서는 말안장의 가죽을 취하여 나팔을 만들어 불고, 수라청 곁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불을 질러 불빛을 볼 수 있게 하여 거사가 성공하였음을 알리니 공이 일에 임하여 혼미하지 않고 일을 처리함에 두루 자상함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다.

 

당시에 일이 황급한 때에 장수와 군졸들이 목이 말라 물을 구해도 얻지 못하였다. 공이 불빛 속에서 대궐의 연못으로 달려가서 물을 취하려 하는데 상서로운 빛이 물 가운데 비추므로 기이하게 여기며 건져내서 보니, 이것은 곧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옥새였다.

즉시 옥쇄를 임금에게 삼가 받들어 올려서 종묘사직의 떳떳한 전함을 완전하게 하였으니, 거룩하고도 아름답도다.

공의 의로운 업적이여. 옥새를 받은 임금이 이 보물이 숨겨진 연못을 수많은 사람이 지나쳤지만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장군만이 홀로 찾을 수 있었으니 이는 장군이 하늘이 내린 충신이기에 하늘이 그대에게 보물을 잠시 맡기신 것이다.


8. 참으로 그대의 충의심은 장하도다 라고 하셨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공로를 기록하는 일을 의논하였는데 공이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은 것은 임진란 때의 사정과 같았다.

공이 바라는 것은 부귀로 그 이름을 드러내고 그 몸이 복잡한 세상일에 얽히고자 하지 않음이었다.

 

이때 공의 나이 51세였다. 1623(仁祖1 癸亥) 3월 15일 반정에 참여한 장군과 원종공신의 작위를 하사하였으나 공은 몇 번이나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보시고 어느 사람은 공훈이 낮다 하여 불만을 가지고 역모를 획책하는 자도 있거늘 공은 어찌하여 최소한의 직위도 사양하려 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 김연에게 명하여 공의 공적을 정리하라하니 김연이 올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천품과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세상에 뛰어난 재능과 지략을 가졌다. 임진란에는 적의 예봉을 꺾었고 반정 때에는 일을 도움이 충성으로 관통하여 도끼를 들어 문을 부수었으니 진실로 자신의 몸이 있음을 잊은 것이다. 공로가 높은데도 직책을 사양하니 겸손한 덕이 이에 밝게 드러났다. 임금이 읽어 보고 충성됨을 칭찬하며 후세에 남기도록 했다.

 

공은 1642(仁祖20 壬午)년에 세상을 버리시니 천수 70세였다.

임금이 공의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시며 이후에는 부조지전위로 사우에 모시고 봉사하라 하시고 관찰사에게 명하시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라 하고 대궐에서는 필요한 물건을 보냈다.

공의 후손들이 이 명에 따라 최근에까지 부조지전으로 받들어 모시다가 공의 배필이신 김해김씨의 기일인 10월 초하루에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공의 자(子)는 휘 준길(俊吉)이고 통정대부였으며 손은 휘 경립(慶立)이고 증통훈대부 장악원정이었다. 증손은 8남인데 그중 세분은 후사가 없고 후달(後達), 후익(後翼), 후성(後盛), 후칠(後七), 후택(後澤)의 다섯분으로 각 파가 나누어졌으니 이것이 이재공의 후예 5파이다.


9. 오파(五派)의 후손은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

 

조상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라고 한다. 이재공은 나라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오직 충성과 의리로 분투하셨으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만나면 천금을 초개와 같이 흩어 구제하셨음에도 그 보답을 바라지 않으셨다.

공의 행적 중에 가장 우러름을 받을 것은 크신 공로가 있음에도 조정에서 내리는 작위를 굳게 사양하신 일이다.

이는 진정한 선행과 진실한 충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겸양지덕으로 인해 높은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종회에서 후손들이 공의 충절과 겸양을 널리 알리고자 결의한 바, 이에 사적비를 건립하니 우리 문중의 후손들은 선조의 행적을 제대로 알고 천추에 빛날 행적을 본받아 조상에 부끄럽지 않고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10.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선산(일선)김씨 점필제파 세거지 

▲ 중앙이 종친회장 호용회장님 좌측이 건양대 교수 동기 종친님, 오른쪽

    이 재희위원장 

▲ 좌로부터 (언선) 이재할아버지 종손 점필제파 종규 종손

▲ 한기범 한남대교수 (한국문중문화연구원장) 

▲ 지두환 국민대 교수 

 

뿌리 찾기의 일환으로 선산(일선) 김씨 점필제파의 세거지인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세거지에서 휘(언선) 이재 할아버지 사적비 건립에 즈음한 내용 설명하고 있는 국민대 교수이신 지두환 교수님. 

▲ 필자 점필제파 도암 시조 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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