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하고 싶다면....
사례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2011.06.20
사례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2011.06.20
http://j.mp/kLxbaK
글쓰기나 강의를 할 때면 필자는 언제나 흥미로운 사례로 시작하고자 노력합니다. 논리와 토론, 그리고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항상 하는 말도 “사례는 논증의 왕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얘기도 추상적인 내용만으로 구성돼 있다면 애초의 목적인 전달과 설득에 실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례가 비근하고 흥미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강의를 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에 더욱 더 주목해야 한다. 철학 강의를 하면서 “오늘 강의는 OO라는 철학자의 ~이론에 대한 것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면, 청중 가운데 절반가량은 이미 졸 준비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철학 강의를 준비하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고, 사례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예를 들어, 평등과 정의에 대해 강의를 할 때면 “여성들도 군대 가야겠지요?”라는 질문으로, 그리고 역사 철학에 대해 강의를 할 때면 “위안부들이 정말 강제로 끌려갔나요?”, “독도가 진정으로 우리 땅인가요?”와 같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청중들은 흥분합니다. 내게 돌을 던지고 싶겠지만, 선생이니 차마 그러지 못할 뿐입니다. 그들은 앞 다투어 내 주장을 반박하고자 하고, 내가 의도한 대로 그 수업은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토론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토론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선생은 학생의 반응과 그에 대한 대답까지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상은 거의 예외 없이 적중합니다. 선생인 필자는 논리에 강할 뿐 아니라, 동일한 주제로 적게는 수십 차례, 많게는 수백 차례 수업을 진행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의 말미에 이르면, (심술을 부리는 극소수를 제외하면)청중들은 대다수 논리적으로 만족스러운 결론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 필자는 “오늘 공부한 것이 바로 OO라는 학자의 ~이론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교육의 기본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세 시간짜리 강의가 있다 합시다. 훌륭한 선생은 절대로 그 세 시간 모두를 수업 내용에 할애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5분 늦게 들어가고, 10분 일찍 끝내는 것입니다. 강의를 개그만큼 재미있게 할 자신이 없다면 말입니다. 수업은 어쨌든 지겨운 법입니다.
학술 세미나에서 교수와 박사들이 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필자의 강의는 개그 프로 못지않게 흥미롭다는 평이 지배적이고, 필자도 그렇게 자부하지만, 대학 강의 당시 필자는 세 시간짜리 강의에서 두 시간을 넘겨 본 적이 없습니다(한 학기에 휴강 한 번도 필수). 이 또한 상대방을 자비롭게 대함으로써 소통을 가능케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기 때문입니다.
두 시간 가운데에서도 그날 수업에서 해야 할 이론적인 내용을 전하는 것은 20분 내외입니다. 나머지 100분은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자극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채우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20~30분 내외면 족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강의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와 주례사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중요한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자 한다면 청중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생각하기에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는 청중들에게 너무나 지겨운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청중이 무엇을 원할지 입장 바꾸어 생각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원리에 따라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동기 부여인 것입니다.
필자가 처음 강의를 시작한 것은 대학 말기의 일입니다. 복학 후 학비와 용돈을 벌어야 했던 사정으로 인해 학원에서 영어 강사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필자는 최선을 다해 최상의 강의를 하고자 노력했지만, 몇 차례고 이유도 모른 채 “잘리기” 일쑤였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필자가 “잘린”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학생들의 수준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당시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영어 참고서를 ‘열강’한 것입니다. 글의 주인이 독자이듯이, 강의의 주인이 청중, 즉 학생임을 알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내게 전환점이 된 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조용해서 필자가 존재조차 잘 인식하지 못하던 한 여학생이,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두세 달 후, 교무실로 나를 찾아와 “선생님 덕분에 영어 점수가 40점이나 올랐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너무나 미안했고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수업 내용 때문이 아니라 동기부여 때문에 믿지 못할 성과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학습 방향에 대해 일일이 필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좋아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여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류대에 입학하였습니다.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처리 속도에서 인간의 두뇌를 따라갈 만한 컴퓨터가 거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컴퓨터의 차이는 바로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컴퓨터는 용량만 허용한다면 주입하는 대로 정보를 저장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정보만을 저장합니다. 더 강한 동기 부여가 주어지는 정보일수록 쉽게 저장할 뿐 아니라, 필요할 때면 그 정보를 순식간에 재생시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학생들은 수동적인 컴퓨터로 취급하는 교육은, 단기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교육이든 회사든, 나아가 그 어떤 집단이든 간에 성취는 소통에 달려 있고, 소통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비의 원칙’에 달려 있습니다. 배재고등학교 출신인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10초짜리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 배재를 사랑합시다”, “여러분, 배재는 영원합니다”와 같은 짧은 훈화로 환호를 받곤 한 것입니다.
사례의 중요성 또한 이에서 기인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학술서보다는 소설을, 소설보다는 만화를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추상적 이론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구성된 사례가 선호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헤아린다면, 소통과 설득을 위해서는 흥미로운 사례나 옛날이야기를 찾아내는 수고를 아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면 스스로의 앎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해 보는 것이 진정으로 인문학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습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했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습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ciokr@idg.co.kr - 김민철 | CI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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