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산책(가나다順)/기독교 바로알기

< 부활절 주간에 부치는 영성 > 짐 엘리엇 - 죠 이 선 교 회 -

http://m1000.org/wiz/user/Biblestudy

이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방문하시는 기념으로 방명록에 짤막한 한 구절이라도 남겨주시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구촌한마음운동 -

⋙⋙⋙GOM + NWN ]⋘⋘⋘

Mythology365 of GOD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 부활절 주간에 부치는 영성 >

짐 엘리엇

- 죠 이 선 교 회 -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 짐 엘리엇의 일기 중에서


짐 엘리엇 선교사의 기도


몇 사람의 사진에는 십자가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를 하였다는 표시입니다.

그 학교 출신으로 선교지에서 순교한 선교사 중에

짐 엘리엇(Jim Elliot)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남미 에콰도르의 이오카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하다가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에게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때 부인은 "말씀을 삼가해 주십시오.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그 곳에 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하여 그 땅에 갔던 것입니다."

하고 대답을 하면서 남편이 휘튼 대학에 다닐 때 썼던

큐티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습니다.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 만족도,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요즘에 <전능자의 그늘> (짐 엘리엇의 생애)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신 것을 보고서 수년 전에 그 책이 나올 때,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 그 책과 함께 짐 엘리엇을 소개하기 위해서 썼던 글을 나누려고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분들이 짐 엘리엇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짐 엘리엇은 저의 믿음의 영웅입니다. 

-----
왜 짐 엘리엇인가?: 우리는 엘리엇의 영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영웅이 없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영웅이 없다. 있다고 해도 많은 경우 연예계의 스타나 운동선수들이다. 이것이 틀렸다고야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영웅 가운데 내세울 수 있는 신앙의 인물이 없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영적 빈곤을 드러내주는 실례이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있다고 하지만 너무나도 시대를 뛰어넘는 인물들이다. 사실 18세기 북미 인디언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가 지난 250여년 간 많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그를 가지기 위해서는 여전히 긴 시간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기는 20여년 전 우리말로 번역되어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조나단 에드워즈 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4). 브레이너드의 영적 유산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드렸을 뿐 아니라, 19세기에 많은 복음주의권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생애와 일기를 통해 깊은 영향을 미쳤던 인도 선교사 헨리 마틴(1781-1812)도 브레이너드 만큼이나 짧은 삶을 통해 참 경건의 진수를 보여준 인물이지만, 역시 꽤나 시간적으로 거리가 느껴지는 인물인 것이 사실이다(존 사전트, <헨리 마틴의 생애와 일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1). 게다가  헨리 마틴과 같은 인물이 우리 말로 소개된 것도 겨우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18세기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그리고 19세기의 헨리 마틴의 영적 계보를 잇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만한 20세기의 짐 엘리엇(1927-1956)의 존재는 그야말로 영웅이 없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영웅이 되기에 합당한 인물이다. 


짐 엘리엇 그는 누구인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어쩌면 그의 이름보다도 더 유명해진 그의 이 말은 많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수없이 회자되고 있다. 22살에 그가 일기에 적은 글이다. 
젊은 나이에 특이할 정도로 경건했고,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했던 청년, 그래서 그리스도께만 바쳐진 삶을 간절히 원했던 청년, 그리고 그토록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28세 죽음. 
1956년 1월 8일, 그는 만 28세의 나이에 네 친구와 함께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고 그리스도를 알리려고 했던 에콰도르 아우카 부족에게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죽음 이후 3년이 지나 그의 아내, 엘리자벳은 남편과 함께 죽은 네이트 세인트의 누이, 레이첼 세인트와 함께 남편을 죽인 아우카 부족에게 들어가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아우카 부족은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되었다. 짐과 그의 아내 엘리자벳의 아우카 부족 선교 이야기는 선교역사에 보기드문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짐 엘리엇의 의미는 그가 드라마틱한 선교이야기 또는 뛰어난 5명의 젊은이들의 순교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다는 점에 있지 않다. 그가 살았던 짧은 삶과 순간적인 죽음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그가 남겨준 유산의 가치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다. 짐 엘리엇의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한 삶의 자취와 사역 그리고 순교의 이야기는 그가 생전에 썼던 일기를 통해서 그리고 아내인 엘리자벳이 쓴 전기와 책들을 통해서 세상에 소개되었다. 엘리자벳은 남편이 죽은 이듬해인 1957년에 <영광의 문>을 통해서 짐 엘리엇의 선교사역과 아우카 부족과의 만남 그리고 순교를 자세히 소개하였고, 다음해 1958년에는 짐 엘리엇의 전기 <전능자의 그늘>을 통해 그의 삶과 신앙을 세상에 알렸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엘리엇의 생애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였고,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었다. 

짐 엘리엇의 삶 


그는 1927년 10월 8일 오리건 포틀랜드에서 플리머스 형제단의 경건한 순회설교가인 프레드 엘리엇과 클라라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회심의 증거를 보였는데, 6살이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집회에서 돌아온 후, 이렇게 말했다. “엄마, 주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좋아요. 이제 저도 구원받았으니 우리 식구들을 다 데려가실 수 있잖아요. 제인은 예수님을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요.” 당시 제인은 1살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웅변왕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불같은 비공식적 설교를 하곤 하였다. 1945년에 일리노이의 휘튼 대학에 입학한 그는 신약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깨달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후에 선교사가 되어 원주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때의 유익을 바라보고 헬라어를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선교사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1학년 때 레슬링을 시작하여 대학 대표팀에 선발되어 활동하기도 하면서 한편 교내 학생해외선교회(FMF) 대표로서 순회선교동원을 하며 설교자로서의 역량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49년 최우등으로 휘튼대학을 졸업한 후, 본격적인 선교사로의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는 졸업 후 2년 반 남짓 고향과 여러 지역에서 선교사로서 준비를 하며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의 도전을 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1952년 2월 마침내 그가 꿈꾸어오던 에콰도르로 출항하게 된다. 결혼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먼저 떠난 짐에 이어 싱글 선교사로 나온 엘리자벳은 결국 1953년 짐의 스물 여섯 번째 생일에 짐과 결혼을 하게 되고, 함께 키추아 인디언 사역을 계속하던 중 짐은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해주기를 오래도록 바래왔던 다른 젊은 선교사들과 함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아우카 부족은 그때까지만 해도 백인들을 포함한 많은 외부인을 보는대로 살해했던 악명높고 접근이 어려운 원시 부족이었다. 그들은 이 계획을 비밀에 붙였고 여러 차례 선물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려주는 접촉을 통해 1956년 1월 3일 그들이 팜비치라고 명한 아우카 부족의 마을에 가까운 쿠라라이 강변에 착륙한다. 아우카 부족에서 나온 세 사람과 꿈같은 우호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후, 1월 8일 다시 그들에게 다가온 아우카 부족에 의해 5명의 젊은 선교사들은 모두 창으로 살해되었고 짐 엘리엇은 친구들과 함께 그의 평생의 기도대로 하나님을 위해 피를 흘리고 그가 사랑하던 주님의 품에 안겼다. 28살의 나이에. 

영성 결핍의 시대가 엘리엇을 필요로 한다 


엘리엇의 삶의 기록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해주는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영성에 관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것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의 위기가 영성을 결핍한 위기임을 반증해준다. 영성을 대표하는 저자들의 묵상록과 책들은 예외없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오고 그들의 명언, 명구들은 난무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영성을 삶 속에서 얼마나 체험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지는 의문이다. 얼마전부터 우리 시대 기독교 안에서 언제나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는 내적 치유의 복음(?)도 자칫 기독교를 역사성과 세계성을 포함하는 복음의 객관성과 총체성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치중하는 주관성으로 축소시킬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이론과 사상의 영역에서 사변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생생한 삶을 통해 보여주고 설득할 수 있는 한 인물이 필요하다. 역할 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엘리엇의 삶은 우리에게 탁월한 영성을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 모델로서 의미를 가진다. 말이 아니고, 단순한 묵상도 아닌 삶으로 드러났고 죽음을 통해 극명해진 그의 살아있는 영성이 삶의 면면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토대위에서 물질적 부와 번영을 생명처럼 추구하던 미국 사회, 그리고 그 시대의 교회에 짐 엘리엇의 삶과 죽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보내신 경고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 한국 사회 속에서 점점 병들어가고 있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의 면모를 점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한국 교회를 깨우는 경종이다. 

짐 엘리엇으로부터 배우는 것 


우리가 짐 엘리엇으로부터 배우는 것들은 “왜 짐 엘리엇인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로부터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순종이다. 


그의 순종의 삶은 행동 없는 감성의 시대에 충격적인 도전이다. 엘리자벳은 순종이란 단어로 짐 엘리엇의 삶의 핵심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전능자의 그늘> 초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순종하면 그분을 알며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그분 안에 거하면 우리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하게 된다.” 이 말처럼 짐 엘리엇의 삶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있을까? 엘리자벳은 이렇게 도전한다. “사람들은 짐과 그와 함께 죽은 이들을 영웅으로, 순교자로 칭송했다. 나는 찬동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그토록 크게 다른 일이란 말인가? 후자는 전자의 논리적 귀결이 아닌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너무나 쉽게 말하는 시대에,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이 구체적인 순종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말은 충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짐 엘리엇의 죽음은 그의 살아온 짧은 삶에서 보여준 것과 그렇게 특별하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을 알기를 소원했고, 그 길은 오로지 순종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의 죽음도 그저 순종하다 죽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그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선교사로서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뛰어났던 이 젊은이의 비할 수 없는 소원은 그분을 아는 것이었다. 그는 스무 살 때 이런 기도를 일기에 남겼다. “주님, 성공하게 하소서.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 아니라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그는 말씀을 공부하느라 성적을 관리하지 못한 것을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번 주에 성적표가 나왔는데 예상대로 지난 학기보다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변명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성경을 공부하느라 일부러 성적에 신경을 덜 썼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인정’(딤후 2:15) 학위를 받고 싶습니다.” 그는 또 대학시절 이런 고백을 남겼다. “인간이 과연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뜻 모를 철학의 수렁에 빠지느니 그분을 아는 지식에 취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는 그의 노력은 절대시간을 투자하는 깊은 성경공부와 묵상 그리고 철저한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실로 나이에 뛰어넘는 성경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로 짐 엘리엇에게서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살아있는 애정이다. 


그는 열 아홉의 나이에 이렇게 적었다. “그리스도를 맛본 영혼에게 명랑한 웃음과 짜릿한 혼성음악과 매혹적 눈웃음은 모두 시시한 일이다. 나는 그분을 깊이 들여 마시리라. 오, 그리스도의 영이시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저를 채우소서.” 스무 살 때에는 “주님, 주님이 제게 주님을 섬길 수도 있고 제 길을 갈 수도 있는 절대적 자유를 주셨음을 압니다. 저는 영원히 주님을 섬기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유인으로 나가지 않겠습니다. 제 귀를 뚫으소서. 주님. 주님의 음성에만 반응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한다. 예수 믿는 삶이 얽매이는 구속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우리 시대에 그의 이런 고백은 얼마나 빛나고 값진 고백인가?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위해 쏟아 부어지는 삶을 살고 싶어 했던 이 청년의 동기는 그리스도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애정, 그것이었다. 


네 번째 교훈은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는 것을 귀중히 여기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렇게 살았던 그의 가치관이다. 


그는 스물두 살 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몇 달에 걸쳐 읽었다. 그리고는 일기에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아무리 지키려해도 지킬 수 없는 것들-생명, 가족, 재산, 명예.....그 모든 일시적인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잃어버릴 수 없고,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 즉 영원한 복락을 놓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이 위하여 죽으신 많은 영혼들이었다. 하나님의 가치가 그의 가치가 되기를 원했고, 그 가치를 위해서 살다가 그 가치를 위해 그는 죽은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하였다. 에콰도르에 선교사로 가기 얼마 전 그는 이렇게 썼다. “당연히 누려도 되는 것을 그분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게는 일편단심과 단순함이 필요하다. 보배도 하나, 시선도 하나, 주님도 하나면 된다.” 스무살 때 그의 고백대로 그는 짧은 한평생을 그렇게 보내고 갔다. 


다섯 번째, 그의 선교적 열정과 선교에 대한 단호하고도 분명한 태도이다. 


그는 잃어버려진 세상의 영혼들을 향해 평범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아버지, 저로 분기점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가 접하는 사람들을 결단의 기로로 이끄소서. 저는 직선 도로의 표지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갈림길로 삼아주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어느 쪽으로든 하나를 택해야만 하게 하소서.” 짐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선교사로 나가기 전 그가 미국에 남아서 젊은이들을 섬기는 사역을 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고국의 살진 교회를 향한 정죄는 은행통장과 성경책 표지의 먼지 속에 씌어있으며, 미국 신자들은 인생을 다 팔아 부의 신을 숭배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라오디게아의 영에 굴복하는 자들을 당신의 의로운 방법으로 처리할 것이며, 자신은 뻔히 멸망하는 키추아족을 두고 국내에 남을 수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죽기 두 달 전 이렇게 썼다. “고국의 젊은이들이 아무도 시간 내서 자기들 문제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방황하고 있는데 선교사들이 굳이 미국을 두고 먼 선교지로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제가 떠나온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고국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듣고 이해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반면 이들 인디언들은 그런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인디언들에게 보여주려면 통나무 두 개를 엇갈리게 놓고 제가 그 위에 누워야 합니다. .... 고국의 죽는 소리하는 젊은이들은 심판날 깨어나 귀신을 두려워하는 이 인디언들보다 더 혹독한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이들은 글자라는 개념도 들어본 적이 없건만 그들은 성경이 있는데도 그것을 귀찮아했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그는 시를 암송하고 그것을 즐겨 낭송할만큼 풍성하고 밝은 정서를 가진 매력적인 청년이었고, 종종 엉뚱한 장난을 할 줄 아는 보통 청년이었다. 어쩌면 그는 약간 우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는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주님만을 위해 살다가 주님만을 위해 죽기를 원했던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그의 모든 것이 되시며, 그가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를 알았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짐 엘리엇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가 단순히 선교사로서 훌륭한 사역을 수행했고 아름답게 헌신한 삶을 살다가 순교한 선교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와 생애를 출판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졌던 동기와 마찬가지로, 짐 엘리엇은 우리에게 참된 성도의 삶과 영성을 보여주기에 너무나도 좋은 모델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바라볼 수 있는 한 영웅으로서 엘리엇의 삶은 의미가 있다. 그는 젊은이로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영웅이 없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소개할만한 한 영웅으로서 짐 엘리엇의 존재는 의미가 있다. 
아벨이 죽어서도 그 피로 말했듯이 짐 엘리엇도 오히려 죽은 후에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스무살 때 드린 그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다. “아버지 제 생명을 취하소서. 주님의 뜻이라면 제 피를 취하소서. 주님의 삼키는 불로 제 피를 태우소서. 제 것이 아니기에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 가지소서. 제 생명을 세상을 위한 희생으로 부으소서. 피는 주님의 제단 앞에 흐를 때만 가치있는 것입니다.”


---

♥♥♥ ♥♥♥ ♥♥♥

---

""*•ڰۣڿڰۣڿ•*""" 공유 및 출처에 대한 고지 ] """*•ڰۣڿڰۣڿ•*""

[공유를 원하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면 삭제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게제후 5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허락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___*~!!!]

다음 주소의 자세한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ttp://wonemind.tistory.com/254 ]

이 글은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ڰۣڿڰۣڿ•*"""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ڰۣڿڰۣڿ•*""
---

[ 출처: http://goo.gl/e06r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