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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혼전병법 - 완벽 해설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손자의 혼전병법 - 완벽 해설

 

1. 격안관화(隔岸觀火): 강 건너 불구경한다. 


'36계' 제9계에는 이 책략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적 내부의 모순이 격화되고 혼란이 일어나 폭란이 생기기를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적은 분열되어 서로 원수가 되며 마침내는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이것은 바로 부드러운 수단으로써 유리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책략을 운용함에 있어서의 요건은 적의 내부가 혼란해질 때 경솔히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적들이 일치 단합하여 반격을 해 올 수도 있다. 말하자면 산에 앉아 범싸움을 구경하는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삼국지 연의'에는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두 차례나 격안관화의 계책을 써서 작은 대가로 큰 승리를 얻는 이야기가 나온다. 


원소가 창정 대전에서 참패를 당한 후 마음이 우울하여 병들어 죽게 되었다. 죽기 전에 원소는 유자(遺子) 원상을 계승자로 삼고 대사마로 임명하였다. 


조조는 이때 투지가 한창 왕성하여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원씨 형제를 토벌하고 일거에 하북을 평정하려고 기도하였다. 


조조의 군사는 파죽지세로 여양을 점령한 다음, 곧장 기주성 아래에 이르렀다. 그러자 원상·원담·원희·고간 등 4로 인마가 합력하여 힘껏 사수하였다. 


조조는 연이어 몇 차례 공격을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 모사 곽가가 계책을 드려 말하기를, "원씨가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세웠기 때문에 형제간에 권력 싸움이 일어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그런데 지금 형세가 급하니 서로 구하고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예 군사를 돌려 남쪽으로 가서 유표를 치며 원씨 형제의 변을 기다리는 것만 못할까 봅니다. 변이 생긴 다음 기주를 친다면 일거에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말대로 가후를 남겨 여양을 지키게 하고 조홍으로 관도를 지키게 한 다음, 자신은 곧 군사를 이끌고 유표를 치러 갔다. 


과연 조조가 철수하자 장자 원담이 곧 원상과 계승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크게 싸우면서 서로 참살하기 시작하였다. 원담은 원상을 이길 수 없게되자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조조는 이 기회를 타서 다시 북진하여 먼저 원담을 죽여 버린 다음, 원희·원상을 차례로 패배시키고 일거에 하북을 점령하였다. 


조조가 두 번째로 격안관화의 책략을 쓴 것은 하북을 점령한 후이다. 당시 싸움에 패한 원희·원상은 요동으로 도망하여 공손강에게로 갔다. 하후돈 등 측근들은 조조에게, "공손강이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원희·원상이 또 가담하였으니 장차 우리의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공손강이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 않은 틈을 타서 속히 가서 친다면 요동을 가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제공의 호위를 빌릴 필요도 없을 것 같소. 며칠 후면 공손강이 두 원씨의 머리를 가져올 것이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손강이 과연 사람을 보내어 원희·원상의 머리를 가져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크게 놀라 조조의 귀신같은 혜안에 감복하여 마지않았다. 


조조는 도리어 크게 웃으며, "과연 봉효(곽가)의 짐작을 못 벗어나는군." 하고 말하며 곽가가 죽기 전에 조조에게 남겨준 편지를 꺼내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듣건대 원희·원상이 요동에 가서 가담했다 하니 명공께서는 절대 군사를 쓰지 마십시오. 공순강은 일찍부터 원씨들이 요동을 병탄할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이번에 두 원씨가 가서 가담하였으니 반드시 이를 의심할 것입니다. 만약 군사로 치신다면 그들은 힘을 합해 항거할 것이나, 늦추어 준다면 공손강과 원씨는 반드시 서로 도모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원래 원소가 살았을 때 항상 요동을 병탄할 마음을 품고 있어 공손강은 원씨 가족들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원씨 두 형제가 와서 탁신하니 공손강은 그들을 없애버릴 생각을 품었는데, 조조가 혹시 군사를 끌고와서 요동을 칠까 두려워 두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를 돕게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손강은 원희·원상이 요동에 이르자 즉시 그들을 만나보려 하지 않고 먼저 사람을 보내어 조조군의 동정부터 탐지하게 하였다. 


세작이 와서 "조조는 역주(易洲)에 군사를 둔쳐 놓고 있는데 요동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하고 회보하자 공손강은 즉시 원희·원상의 머리를 베어 조조에게 바쳤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조는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였다. 

 

2. 교왕과정(矯枉過正): 굽은 것을 펴려면 곧은 한계를 지나야 한다. 


'교왕과정'이란 말은 일찍이 '월적서'에서 볼 수 있는데 '교와과직'이라고 하였다. '염철론'에도 이 말이 있는데 '교왕과자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한서'에서부터 '교왕과정'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하여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 조조도 어릴 적에는 아주 못된 불량 소년이었다. 돈 많고 권세 있는 집 자식으로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 오직 방탕을 일삼던 망나니 조조에게 장래를 점치게 하는 변신의 기회가 온다. 지금 같으면 군대에 갈 나이인 20세 때 수도 경비 대장으로 임명된다. 


그의 소행으로 봐서는 당치도 않은 자리지만, 태위를 지낸 아버지 조숭의 후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대장으로 임명되자 조조는 딴 사람처럼 변해 즉각 수도인 낙양(洛陽)의 4대문을 철저히 보수하고는 다섯 가지 색을 칠한 몽둥이를 만들어 성문의 좌우에 10개씩 세워놓았다. 그리고는 그 동안 뇌물을 받고 적당히 눈감아 주던 야간 외출을 엄격히 금지 심키고 위반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조리 처형했다. 


이리하여 몇 달이 지났다. 조조의 추상같은 영이 서민들 사이에 널리 전해져 범법자가 자취를 감추게 될 즈음이었다. 


당시 황제가 총애하는 환관에 건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자가 바로 황제를 둘러싸고 권세를 휘두른 환관 그룹인 십상시(十常侍)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자의 아저씨가 금지령을 어기다가 적발됐다. 


'제까짓 조조 따위가 나를 감히 어찌하랴." 하고 그는 제 조카의 권세를 믿고 오히려 거드름을 피웠다. 


그런데 조조는 끌려온 건석의 아저씨를 즉석에서 처형해 버렸다. 나이 20에 벌써 장래 천하를 경륜하는 기린아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장안은 벌벌 떨고, 그로부터 영을 어기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한편 십상시의 무리들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법이 있고 법대로 처리한 것이니, 아무리 황제를 둘러싸고 권세를 부리는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거니와, 또 그런 틈새를 줄 조조도 아니었다. 


건석 등은 전술을 바꿔 이번에는 조조를 칭찬하고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돈구현의 지사로 임명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외지로 쫓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주머니에 있는 송곳은 언젠가는 뚫고 나오는 법이다. 그만한 인물이 언제까지나 지방에서 썩을 리가 없었다. 임명된 그 해 그는 다시 낙양으로 돌아오는데, 그 무렵 환관들의 횡포를 보다 못한 대장군 두무와 태부인 진번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정보가 새어 환관들에게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 사건을 문제삼아 황제에게 상소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조는 그후로도 수삼차 상소를 했지만 이미 아래 위가 썩을 대로 썩은 조정은 날로 어지러워져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이미 대세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상소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조조에게는 제2의 인생이 싹트기 시작한다. 


일찍이 조조는 사람을 잘 볼 줄 안다는 허자장(許子將)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 허자장은 조조를 보고, "태평한 시대라면 유능한 신하(能臣)가 될 것이고 어지러운 세상이라면 간사한 영웅(英雄)이 될 것이다." 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 예언이 바로 맞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조의 인물 형성도 그 시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3. 난득호도(難得糊塗): 바보짓하기 어렵다. 


청나라 때의 서화가이며 문장가인 정섭의 자는 극유이고 호는 판교였다. 


그는 "총명하기 어렵고 바보짓하기도 어려운데 총명하면서도 바보가되기는 더욱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밝으면 벗이 없다." 어떤 때는 지둔한 척하는 것이 오히려 너무 민감한 것보다 더욱 유리하다. 

 

4. 당랑포선 황작재후(螳螂捕蟬 黃雀在後): 대세를 통찰한다. 


원뜻은 연가시가 매미를 잡으려는데 꾀꼬리가 뒤에 있다는 뜻으로, 한나라 유향의 '설원·정간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산에 나무가 있고 거기에 매미가 있는데, 매미는 높이 앉아서 슬피 울며 이슬을 먹으면서 뒤에 연가시가 있는 줄을 모르고, 연가시는 또 몸을 굽혀 매미를 잡으려 하면서 그 옆에 꾀꼬리가 있는 줄을 모르고, 꾀꼬리는 또 목을 늘여 연가시를 쪼으려 하면서 자기의 밑에 탄환이 있는 줄을 모른다. 이 삼자는 눈앞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그 뒤에 후환이 있는 것을 돌보지 아니한다." 


이 이야기는 저치·군사·외교 등에 널리 인용되거나 또는 응용되는 것으로서, 고금의 통치자들이 전략을 세울 때 각 방면의 요소들을 골고루 돌보고 이해를 세심하게 잘 따져보게 하는 교훈이 되고 있다. 


'삼국지 연의'에 보면 조조가 유비·손권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결전하기 전야에 서량의 마등·한수가 기회를 타서 중원을 공격할 까봐 근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조조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서서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산관으로 가서 마등·한수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또 유비가 병마를 거느리고 서천을 취하려 할 때였다. 조조가 돌연 오나라를 향하여 대규모의 공격을 가하니, 손권은 편지를 써서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손권을 구해 주지 않을 경우,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린 국면이 되어 나중에는 조조에게 각개 격파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오나라를 구원하느라면 서천을 취할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었다. 


제갈량은 전반 국면을 통찰하고 즉시 마초에게 글을 띄워 그로 하여금 조조의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오나라의 위급을 구해 주었으며, 유비는 계속 서천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후 이번에는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서천을 치자 제갈량은 유비에게 권고하여 강하·장사·계양의 세 고을을 오나라에 되돌려 주는 대가로 오나라로 하여금 조조의 후미를 치게 함으로써 서천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눈앞의 이익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전반 국면의 추세를 보면서 적을 이길 책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5. 대용약겁(大勇若怯): 참으로 용감한 사람은 도리어 겁내는 듯하다. 


송나라 소식이 쓴 '구양수가 벼슬 떠나는 것을 축하한다'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대단히 용감한 사람은 도리어 겁내는 듯하고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은 도리어 어리석은 듯하다." 


담량이 있으면서도 나타내지 않는 것은 담량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줄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 사람이 깊은 지모와 원대한 목표가 있음을 말해 준다. 바로 이러한 겁기와 나약성으로 은폐되어 있는 용기가 왕왕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많은 것이다. 


유비가 소패성에서 여포에게 패한 후 몸둘 곳이 없어 하는 수없이 조조의 수하에 탁신하였다. 


후에 조조는 유비를 허창으로 데려갔는데, 목적은 유비를 꼼짝 못하게 했다가 나중에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유비가 자기 마음속에 큰 뜻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후원에 채전을 일구어 놓고 열심히 물주며 가꾸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조가 갑자기 유비를 연희에 참석하라고 청하였다. 술이 반 취하였을 때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더니 폭우가 쏟아지려고 하였다. 


조조가 하늘의 번개를 가리키며, "용이 능히 커지고 작아지며 오르기도 하고 숨기도 하니 사람과 비기면 한번 떨쳐 구천에 오르는 절세의 영웅과 같지 않소." 조조는 말을 마치고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유비에게 물었다. 


"금세에 영웅이 누구라고 생각하오?" 


"원술·원소·유표 등이 아닐지……"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배에는 깊은 모략을 감추며 우주의 기틀을 싸고 천지의 뜻을 삼키는 자라야 비로소 영웅이라 할 수 있지요." 


유비가 물었다. 


"누가 그런 영웅입니까?" 


조조는 손으로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유비를 가리키고, 이어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지금 천하의 영웅으로는 오직 공과 내가 있을 뿐이오." 


유비는 조조가 자기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큰 뜻을 꿰뚫어 보았는가 싶어 깜짝 놀라 수저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때 마침 뇌성벽력이 울리며 큰비가 퍼부었다. 조조가 유비를 쳐다보며 어찌하여 수저를 떨어뜨렸냐고 묻자 유비는, 


"성인이 말하기를 '우레가 울부짖고 바람이 세차면 반드시 변이 있다'고 했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우레란 천지의 음양이 부딪치는 소리인데 무엇이 그렇게 놀라울 것이 있겠소?" 


유비가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우렛소리를 두려워하여 그 소리만 들으면 몸을 숨기까지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마음속으로 냉소라며 유비는 겁많은 무용지인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후 유비는 수하 장수인 관우와 장비를 보고 말하였다. 


"내가 후원에 채소를 심은 것은 조조가 나를 무용지인으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조가 나를 가리켜 영웅이라 하는구나. 그래서 우렛소리에 깜짝 놀라는 척 수저를 떨어뜨린 것이었지." 


그후 유비는 일군을 빌려 원술을 치러 가겠다고 하니, 조조는 의심하지 않고 허락해 주었다. 유비는 밤을 도와 말안장을 얹고 병장기를 수습하여 장군인을 차고 군사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관우가 장비가 이번 출전은 왜 이렇게 황급히 서두느냐고 유비에게 묻자 유비가 대답했다. 


"지금의 내 형세가 조롱 속의 새이고 그물 안의 고기가 아닌가. 이번이 길이 고기가 바다에 들어가고 새가 구름을 뚫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인데 어찌 서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제 다시는 조조의 절제를 받지 않으리라." 


그때 조조의 모사 곽가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급히 조조를 찾아보고 간하였다. 


"유비는 영웅의 기개가 있고 또 깊이 민심을 얻었으니 남의 밑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닌 데다가 그 속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 그에게 군사까지 주시니 범에게 날개를 더해 준 것이 아닙니까." 


"내가 보건대 유비는 한가하면 채소나 심고 우레 따위를 무서워하는 무용지인인데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소?" 


라고 대답하면서도 조조가 곰곰 생각해보니 유비에게 군사를 내어준 것은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렇게 조조가 유비를 놓아줌으로써 후에 삼국 정립의 형세가 되었거니와, 유비는 겁기로 자기의 용맹을 감추어 끝내 패업을 이룩했던 것이다. 

 

6. 문치무공(文治武功): 문덕으로 다스리고 무위로 공을 세운다. 


'한비자·내저실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문치무공의 정신으로 노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길에서 남이 떨어뜨린 물건을 줍지 않게 하였으며, 국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성해지게 하였다." 


공자는 "문관도 반드시 무력을 길러야 하며 무관도 반드시 문덕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양자는 상호 의존하고 상호 촉진하는 것이므로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기원전 500년, 공자는 노정공을 배행하여 제경공과 동맹을 맺으러 제로변계의 겹곡산으로 가게 되었다. 노정공은 두뇌가 비교적 단순하여 무력 강화 조치를 취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공자는 노정공에게 문사를 볼 때에도 반드시 무력을 준비해야 하며, 문무지사가 서로 갈라질 수 없는 도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송양공이 무력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권을 잃은 예를 말한 다음, 좌우 사마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수행하게 하라고 하였다. 


회맹 지점에 이르러 공자는 제나라의 많은 부대가 주위에 주둔해 있는 것을 탐지하고, 좌우 사마에게 경각심을 높이어 한시라도 싸울 준비를 할 것을 명령했다. 공자는 또 대부 자무에게 병차 300승을 거느려 회맹 지점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제나라의 대부 이미는 제경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자는 예만 알고 용맹이 없으며 또한 싸울 줄도 모르니, 내일 회맹에서 우리는 300명의 태이인(소수 민족)을 악공으로 분장시켰다가 그들이 준비가 없는 틈을 타서 노나라의 군신들을 모조리 붙들고 수종들을 죽여 버리면 노나라의 운명은 우리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튿날 제나라와 노나라의 양국 군신 4명이 단에 올라 회맹(서로 만나 맹세하는 일)할 때 제경공은 300명의 태이인이 앞으로 나와 본토의 음악을 울리게 했다. 


노정공은 깜짝 놀라 낯색이 변하였으나 공자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자는 먼저 제경공더러 음악을 걷어치우게 했다. 제경공은 사태를 짐작하고 태이인들을 나가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공자는 또 제경공에게 노정공을 모욕한 악대의 대장을 법에 의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경공이 동의하지 않자, 공자는 대노하여 칼을 짚고 눈을 부릅뜨며 말하였다. 


"두 나라가 좋게 지내면 형제나 마찬가지인데 노나라의 집법관이면 곧 제나라의 법관이나 같은 것이다." 


공자는 손을 들어 좌우 사마를 큰소리로 부르니 두 장군이 나는 듯이 단에 올라와 남녀 악대 중에서 대장을 각각 하나씩 뽑아 당장에 목을 쳐버리니 나머지는 질겁하여 달아나고 말았다. 


회맹은 무의미하게 끝나고 말았다. 제경공은 몹쓸 의견을 내놓은 대부 이미를 호되게 꾸짖고 나서, 양국간의 우의를 위하여 그전에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7. 선모후사(先謨後事): 앞서 꾀하고 후에 착수한다. 


'고금도서집성' 병략부에서 '강태공은 가히 출병하여 상나라를 토벌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앞서 꾀하고 후에 착수하는 자는 흥하고, 앞서 착수하고 후에 꾀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기본 원칙으로서, 어떤 행동이든지 반드시 충분한 준비가 있는 기초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1068년 주무왕 희는 맹진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강태공 등 여러 모신들의 지혜를 모아 상나라를 멸망시킬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에 앞서 주무왕의 아버지 주문왕도 이미 상나라를 칠 준비를 하였기에 주문왕이 죽었을 때는 상나라를 멸망시킬 시기가 이미 성숙되어 있었다. 


주나라는 이미 3분 천하에서 그 2를 차지한 상조의 서부에서 가장 강대한 제후국이었다. 


강태공은 일찍이 문왕에게 말하기를, 


"매가 새를 공격할 때는 몸을 낮추고 날개를 접으며, 맹수가 짐승을 덮칠 때는 머리를 낮추고 몸을 구부려 엎드리는 법입니다. 성인이 큰 일을 하려 하면 반드시 어리석은 기색을 보여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문왕에게 상나라를 칠 시기를 노리되 행동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하여 상대방이 주의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주나라 무왕 11년(기원전 1066년), 무왕은 상나라의 주왕이 직간한 죄로 숙부인 비간을 살해하고 심장까지 꺼내 버렸다는 보고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주왕은 그의 서형인 기자가 자기의 잔혹 음탕한 데 대하여 불만을 품었다고 하여 감금하고, 그의 또 다른 서형인 미자도 나라 형편이 위험한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하였지만 주왕이 듣지 않자 떠나 버리고 말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왕이 강태공에게 물었다. 


"어질고 능한 자가 망하니 상나라를 칠 수 있지 않겠소?" 


강태공이 대답했다. 


"앞서 꾀하고 후에 착수하는 자는 흥하고 앞서 착수하고 후에 꾀하는 자는 망합니다. 하나라 때의 조례는 끝맺을 때가 되었고 겨울의 얼음은 풀릴 때가 되었습니다. 기회는 얻기 어렵고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무왕은 드디어 그해 정월에 전차 3백승, 용사 3천명, 갑사 4만 5천명을 거느리고 각 제후국들과의 맹진에서 회맹하였다. 


2월 5일, 목야에 군사를 벌여 놓고 무왕은 주왕의 죄를 성토하고 사졸을 고무하였다. 목야 한 차례 싸움에서 몇십만의 상나라 군대는 와해되어 뿔뿔이 도망하였다. 


주왕은 녹대에 올라 스스로 불에 타죽고 말았으며 상왕조 600여 년의 통치는 이로써 끝났다. 

 

8. 소리장도(笑裏藏刀): 적을 방심시킨다. 


'소리장도'는 웃음 속에 칼을 감춘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싱글벙글하지만 내심은 음험하다. 


겉으로는 웃음으로 상대를 방심시키는 한편, 은밀히 적극적으로 준비하여 시기가 오면 불의에 공격을 한다.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적의 대응이 겸손한 태도로 나오는 것은 실은 이 쪽으로 공격을 가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약속도 없이 화해를 말해 올 때는 실은 딴 데 겨냥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적이 상냥하게 나오거나 달콤한 말을 걸어오는 것은 이쪽을 속이려는 속셈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송나라의 조위(曹瑋)는 위주의 자사였다. 그의 군율은 매우 엄해서 서하인(西夏人)들은 몹시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부장들을 모아놓고 주연을 열고 있었는데, 돌연 수천 명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서하로 도망쳐 버렸다. 많은 장수들은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두려워했으나 오직 조위만은 태연하게 담소하면서 평소와 같이 이렇게 말했다. 


"염려 마라. 그들은 내 명령에 의한 것이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서하의 왕은 송나라 군사들이 도망쳐 온 것은 그 뒤에 간계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알고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조위의 임기응변의 모략이었다. 


지백(智伯)이 위(衛)나라를 치기 위한 사전 공작으로 말 4백 필과 백옥(白玉) 한 개를 위왕에게 선물했다. 


위왕은 크게 기뻐하며 군사들을 모아놓고 축하를 했으나, 남문자(南文子)만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왕이 의아하여 물었다. 


"대국이 큰 호의를 보여주었는데 그대가 근심스러워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오?" 


남문자가 대답했다. 


"공이 없는데도 주는 상(賞)이나 노고를 들이지 않았는데도 주는 예물은 그 속에 독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4백 마리의 말과 한 개의 구슬은 마땅히 소국이 취해야 할 예(禮)입니다. 그럼에도 대국이 그렇게 호의를 보이고 있으니 군주께서는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위왕은 그 말의 뜻을 깨닫고 한층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도록 했다. 


그후 지백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국경까지 쳐들어 왔다가 위나라 국경의 방비가 엄한 것을 보고 철수하며 말했다. 


"위나라에 현인(賢人)이 있어서 이쪽의 계략을 미리 알아버렸구나." 

 

9. 쌍관제하(雙管齊下): 두 가지 방법으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장조는 당나라 때 오군 사람으로, 소나무나 돌·산·물을 잘 그리는 화가였다. 그는 회화 예술에서 독창적인 방법과 독특한 풍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당송 회화사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당나라 현종 때 그는 일찍이 검교사부원외랑을 지내다가 후에 강등되어 장안을 떠나 무릉군 사마가 되었다. 


송조 때 곽약허의 '도화견문지'에 보면 장조는 회화 창작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능히 두 손으로 두 붓을 쥐고 동시에 두 개의 소나무를 그리는데, 한 붓이 그린 것은 윤함춘택하여 생기가 넘치고, 다른 한 붓이 그린 것은 참담하기 가을빛 같아 초졸하고 메말랐다. 


부동한 형상은 한가지로 생동하여 그의 쌍관제하의 본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 


두 개의 붓으로 동시에 시작하여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을 '쌍관제하'라고 한다. 


이 말은 후에 하나의 성어로 되어 무릇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쓰거나 혹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때 '쌍관제하'라고 하게 되었다.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때는 학문에 의거해야 하고 어떤 때는 무력을 쓰기도 한다. 즉, 정치 수단뿐만 아니라 경제·군사·외교 등의 수단도 써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하나의 방식에 완전히 의거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두 다리 걷기'방법을 채용하라는 뜻이다. 

 

10. 안불망위(安不忘危): 안정할 때 위험함을 잊지 않는다. 


'이·계사' 하권4에는 "군자는 안정하여도 위험함을 잊지 않고, 생존하여 있으면서도 망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다스려져도 혼란한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야만 능히 몸이 안전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또 '백전기법' 망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안정할 때 위급함을 잊지 말고 태평할 때 난리를 잊지 말라는 것은 성인의 지극한 타이름이다. 천하가 무사하다고 무력을 없애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단 불한당이 일어나면 무엇으로 막겠는가. 반드시 안으로는 문덕을 닦고 밖으로는 무력을 엄히 기르며 외교를 중시하면 실책함이 없을 것이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가 망하고 제왕 전건은 포로가 되었다. 진시황은 그를 공(共)으로 쫓아보냈는데 얼마 못 가서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제나라가 망한 주원인은 제왕이 장기간 무력을 기르지 않고 현 상태에 만족하면서 안일 만 추구한 것이었다. 


제왕 전건은 40여 년의 재위 기간에 어릴 때는 국사를 군왕후에게 맡겨 처결하면서 중원에 대한 겸병(兼?) 전쟁에 대해 무관심하였으며, 그저 제후들간에 친교만 있으면 곧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왕후가 죽은 뒤에도 제왕 전건은 여전히 얼떨결에 세월을 보내었다. 제나라 조정의 뜻있는 사람들이 사직을 위하여 무력을 길러 나라의 위세를 떨쳐야 한다고 권고하였으나, 그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나라 대군이 국경을 넘어 들어오자 어쩌지 못하고 붙잡혀 나라를 망친 임금이 되었으며, 모멸과 수치의 기둥에 못 박히고 말았다. 전쟁을 잊으면 꼭 위험하다는 것은 제왕이 우리에게 남겨준 커다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11. 욕금고종(欲擒故縱): 잡으려면 먼저 놓아준다. 


추격이 너무 지나치면 적의 반격을 받는다. 쫓겨가는 적은 그 세력이 이미 약해져 있는 것이다. 적은 놓치지 않을 정도로 그 뒤를 쫓아야 한다. 너무 바짝 몰아 붙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힘을 소모시키고 그 투지를 와해시켜 지리멸렬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붙잡도록 해야 한다. 천천히 대응하고 세심하게 실행하여 적을 와해시켜야만 우리 쪽에 피해가 적고 유리하다. 


여기서 놓아준다는 것은 적을 내팽개쳐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뒤를 쫓는 방법을 다소 느슨하게 하라는 뜻이다. 


궁구(窮寇), 즉 궁지에 몰린 적은 쫓지 말라고 손자(孫子)가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뜻이다. 


쫓지 말라는 것은 뒤를 쫓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지나치게 적을 몰아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중국의 삼국시대 제갈량이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는 이른바 칠종칠금의 계략을 썼는데, 이것은 곧 그렇게 함으로써 적장 맹획(孟獲)의 뒤를 쫓아, 그때마다 지역을 넓혀 간다는 계략이었다. 


일곱 번 놓아주는 그의 속셈은 영토의 확대에 있었던 것이며, 맹획을 하나의 본보기로 하여 다른 민족들을 항복시켜 나갔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12. 이대도강(李代挑?): 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죽다. 


이 말은 서한의 무명씨가 지은 '계명편'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복숭아나무는 우물 옆에 자라고 살구나무는 그 옆에서 자랐다. 벌레가 와서 복숭아나무 뿌리를 먹으니 살구나무가 가슴을 뻗치고 서서 복숭아나무를 보호하려 하였다. 나무도 서로 몸바쳐 구하려 하는데 형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대도강'은 남을 대신하여 과오를 지거나 남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 또는 갑으로 을을 대신하는 일종의 책략이다. 


전쟁에서 국부적 이익을 희생하여 전반 국면의 주동을 바꾸는 것, 갑을 버리고 을을 취하는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구체적인 예로는 고대의 손빈이 말달리기를 할 때, 하등말로 상대방의 상등말과 겨루어 한 판을 진 다음, 자기의 상등말로 상대방의 중등말을 이기고 자기의 중등말로 상대방의 하등말을 이기는 것이 그것이다. 


또 '삼국지'의 주유가 고육계(苦肉計)로 황개를 때릴 때 하나는 때리려 하고, 하나는 맞기를 소원한 것도 모두 이대도강의 성공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대도강'의 책략을 운용함에 있어서의 관건은 득실을 잘 계산하고 획책을 잘 하는 데 있는 것으로서, 간단하게 승부의 차수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최후의 승리를 누가 쟁취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13. 이호경식계(二虎競食計): 라이벌끼리 싸움을 붙인다. 


한(漢)나라의 실권을 틀어쥔 조조는 후당에 연석을 크게 배설하고 수하의 문관·무장들을 모아 상의했다. 


"근자에 들으니 여포가 유비에게로 가서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에 이 두 사람이 동심 협력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범한다면 실로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 공들은 무슨 묘계가 없겠소?" 말이 떨어지자 맹장 허저가 나섰다. 


"저에게 정병 5만만 빌려 주시면 유비와 여포의 머리를 베어다 승상께 바치겠습니다." 


순욱이 웃으며 말했다. 


"장군이 용맹은 남에게 뛰어나지만 어찌 계책을 쓸 줄 아시겠소." 한 마디 하고, 이어서 조조에게 말했다. 


"이제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저에게 한 계교가 있으니 '이호경식계(二虎競食計)'라, 이제 유비가 비록 서주를 점거(占據)하고는 있으나 아직 조명(詔命)은 얻지 못한 터이니, 승상께서는 조명을 주청하여 유비로 서주목(徐州牧)을 삼으시고, 다시 한 통의 밀서를 보내시어 여포를 죽이라고 하십시오. 유비가 여포를 없애고 보면 그의 형세가 몹시 외로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또 만약 일을 이루지 못하고 보면 여포가 또 반드시 유비를 죽이고 말 것이니, 이것이 곧 '이호경식계'라는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말을 좇아, 즉시 조명을 주청하여 유비로 의성정후(宜城亭侯) 서주목을 삼고, 사자에게 또 따로이 한 통의 밀서를 주어 서주로 내려보냈다. 


유비는 성밖까지 나가서 황제의 사자(使者)를 맞아들였다. 주아(州衙)로 돌아와 은명(恩命)을 배사하고, 곧 연석을 배설하여 환대하니, 석상에서 사자가 말했다. 


"군후(君侯)께서 이번에 이 은명을 받으시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인 줄 아십니까. 실은 조승상께서 힘써 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덕이 자리에서 일어나 칭사하고 나자, 사자는 품에서 밀서를 내어 그에게 주었다. 유비는 보고 나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생각해 하오리다." 간단히 한 마디 하고는 다시 잔을 들어 술을 권했다. 


이날 연석을 파하자 유비는 사자를 관역(館驛)으로 인도하여 편히 쉬게 한 후, 곧 무리들을 모아 이 일을 상의하였다. 


조조가 밀서를 보내서 여포를 죽이라 하였다는 말을 듣자, 수하의 맹장 장비가 곧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여포로 말하면 본래 의리가 없는 놈이니 죽인들 무슨 상관이겠소." 그러자 유비가 말하였다. 


"제가 형세가 궁해서 나에게 온 터에 내가 그를 죽인다면 이도 역시 의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느냐." 


"마음도 참 착하십니다. 그런 놈 죽이는 거쯤 어때서 그러십니까." 


장비는 재삼 권하였으나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튿날 마침 여포가 찾아왔다. 유비는 곧 청하여 들이니 여포는 하례 인사를 드렸다. 


"이번에 공이 조정의 은명을 받으셨단 말씀을 듣고 특별히 하례하러 왔습니다." 


바로 그때 장비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청상(廳上)으로 뛰어 올라와 다짜고짜로 여포를 치려 했다. 유비는 깜짝 놀라 황망히 그의 칼 든 팔을 덥석 잡으며 소리를 가다듬어 꾸짖었다. 


"이놈, 네 이게 무슨 짓이냐!" 


여포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뛰어 일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놀라기보다도 오히려 어찌 된 까닭을 몰라,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아니, 장군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는 거요?" 


유비는 얼른 대꾸를 하지 못하는데, 장비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조조가 너를 의리 없는 놈이라고 우리 형님더러 잡아 죽이라고 했다." 


장비가 소리를 크게 지르니, 유비는 


"듣기 싫다. 어서 물러가거라. 썩 나가지 못하겠느냐!" 


연방 꾸짖어 물리치고, 


"장군, 안으로 들어갑시다." 


유비는 여포를 청하여 후당으로 들어갔다. 서로 자리를 나누어 앉자, 여포가 곧 입을 열어 물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조조가 뭐 공더러 나를……" 


유비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 


"내가 말씀을 하오리다. 이번에 실은 조조가 밀서를 보내 왔는데 그 밀서에 나더러 장군을 죽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 품에서 조조의 글을 꺼내어 여포에게 보여주었다. 여포는 보고 나자 얼굴빛이 홱 변하였다. 그는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여, 


"공은 그래 나를 죽이시려오?" 


한 마디 묻는 그 목소리조차 떨려 나왔다. 유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장군을 죽일 마음이 있다면 이 밀서를 보이겠소." 


여포는 유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것은 조조 도적놈이 우리 두 사람을 불화하게 만들려고 낸 꾀요." 


유비는 위로하였다. 


"장군, 아무 염려 마시오. 조조가 이런 글을 보냈다고 내가 어찌 불의(不義)한 짓을 하겠소. 그저 나를 믿으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여포는 짐짓 고마움을 표했으나, 그 뒤로부터 기회만 노리고 잇다가 끝내는 유비의 서주성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고, 나중에는 여포도 조조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14. 장수선무(長袖善舞): 팔소매가 길면 춤추기 좋다. 


"팔소매가 길면 춤추기 좋고 돈이 많으면 장사하기 좋다"는 말은, 춤을 추는 사람은 팔소매에 의거하기 때문에 팔소매가 길면 나풀나풀 날려서 자태를 아름답게 연출할 수 있고, 장사를 하는 사람은 밑천에 의거하기 때문에 밑천이 많으면 그 일도 용이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기·범수 채택전'에 인용되어 있는데, 범수와 채택은 전국 말기의 유명한 두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소위 '변사'로서 말을 잘 하였다. 전국 시대에 변사가 적지 않았지만, 어찌하여 이 두사람이 능히 왕의 신임을 얻고 재상까지 될 수 있었을까? 


범수와 채택은 뛰어난 무도자에게 아름다운 춤옷이 있고 유능한 상인에게 많은 밑천이 있는 것처럼 변사인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뛰어난 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 무대에서 활약하려면 풍부한 학식과 영민한 두뇌를 구비하여야 하고, 군사 분야에서 종횡하려면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를 알아야 하며 밖으로는 적정을 알고 안으로는 민심을 알아야 한다. 

 

15. 장욕약지 필고강지(將欲弱之 必固强之): 약하게 하려면 강해지게 한다. 


이것은 생금하기 위해 먼저 고의로 놓아주는 것과 비슷하다. '노자·도덕경'에 "모이려면 벌려야 하고, 약해지게 하려면 먼저 강해지게 해야 하며, 덜어 버리려면 먼저 더해주고, 빼앗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적이 아직 강성할 때나 혹은 적의 흉악한 면모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거나 또는 세인들이 미처 간파하지 못하였을 때는 급히 적과 맞딱뜨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적의 의지를 교만 방종하게 하면서 적이 나태하고 해이해지기를 기다려, 세인들이 더욱 똑똑히 깨닫고 우방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때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주 시대의 정장공이 언에서 공숙단을 이긴 이야기는 유명하다. 정장공은 그의 이복 동생인 공숙단이 내응외합하며 정권을 찬탈하려는 기도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땅을 주어 성을 쌓게 하는 등 공숙단의 일련의 준비를 은근히 도와주면서 짐짓 모른 척하였다. 


그의 어머니 강씨는 정장공을 향하며 공숙단에게 영지를 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공자 여는 반대하였지만 정장공은 이를 일축하였다. 


"모친이 그렇게 할 것을 희망하는데 요구를 만족시켜 드리지 않으면 편안할 수 없다." 


측근에서 공숙단이 군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이며 병졸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보고하면, 


"공숙단이 정나라를 위하여 병마를 조련하는데, 이 어찌 수고가 많고 공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라고 하였다. 


또 공숙단이 경성 부근의 작은 성을 점령하였다고 알리자 공자가 나서 정장공에게 출병하여 토벌하자고 했으나 그는 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스스로 죽는다. 군자는 오직 기다릴 뿐이다." 


마친매 공숙단과 그 어머니의 음모가 완전히 폭로된 다음에야 정장공은 비로소, 


"이제 그들을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리고는 치밀하게 준비해 두었던 대로 공숙단과 그 어머니 강씨가 거사할 때 가감한 조치를 취하여 공숙단의 탈권 음모를 좌절시켰다. 공숙단은 이국으로 쫓아 버리고 강씨는 성영에 유폐하였다. 

 

16. 장욕취지 필고예지(將欲取之 必姑豫之): 가지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전국책·위책 1'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패하게 하려면 먼저 도와주고, 가지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은 잠시 양보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책략이다. '한비자·설림'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춘추 말기의 진(晋)나라에서는 조·위·한·지·범·중행 등 6개 가족의 세력이 제일 컸는데, 이를 '6경'이라 부르기도 했다. 범·중행 두 집이 겸병된 후 지백은 위나라의 선자에게 영지를 요구하였다. 위선자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다. 


그러자 위선자의 모사 임장이 계책을 드려 말하였다. 


"정면으로 지백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고 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는 단맛을 보고 나면 틀림없이 오만해져서 더욱 욕심이 생겨 계속 손을 내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대부들도 필경 불만을 가질 것이니 그때에 가면 각 집이 연합하여 오만 방자한 지백을 견제하게 될 텐대, 그의 목숨이 어찌 그냥 보전될 수 있겠습니까?" 


위선자는 임장의 계책에 따라 일부의 땅을 떼어 지백에게 주었다. 그후 지백은 과연 조·위·한의 반격을 받고 위선자는 실지를 수복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땅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17. 진정지곡(秦庭之哭): 상대방을 감동시킨다. 


'진정지곡'의 원뜻은 진나라 조정에서 통곡한다는 것이다. 


오자서와 신포서는 원래 매우 친밀한 벗이었다. 초나라의 평왕이 오자서의 부형(父兄)을 살해하자, 오자서는 오나라로 도망하여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켜 부형의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였다. 


신포서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나라를 배반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으나 오자서는 듣지 않았다. 


신포서가 말했다. 


"만약 자네가 꼭 초나라를 멸망시키겠다면 나는 꼭 초나라를 부흥시키겠네." 


두 사람은 이 때부터 친구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후에 오자서는 오나라의 공자를 도와 정권을 탈취하고 그로 하여금 오나라의 왕이 디게 하였다. 그리고는 초나라의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오왕을 책동하여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쳤다. 


그때 초나라의 평왕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소왕은 창황히 도망하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시체를 파내어 채찍으로 300대를 때리고 눈알을 뽑아내고 귀를 뜯어내었다. 


신포서는 오자서가 이렇게 잔인 무도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몹시 격분하여 곧 소왕을 찾아가 초나라를 회복시킬 대계를 상의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초나라는 내부의 역량이 말할 수 없이 쇠약해져 있어서 이웃나라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포서는 진(秦)나라에 원조를 구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초평왕의 부인은 진애공의 딸이었고 초소왕은 진애공의 외조카였기 때문에 진나라도 그저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다. 


초소왕은 신포서를 특사로 임명하여 진나라로 급히 가게 하였다. 신포서는 진애공을 보고 초나라의 위급한 상황과 오나라의 횡포를 갖추어 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는 본저장사(큰 멧돼지와 긴 구렁이)와도 같아 욕심이 끝이 없으므로 초나라를 멸한 뒤에는 형세가 계속 커져 중원을 도모할 것인데 그때는 진나라도 태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토벌하는 것은 초나라를 도와 그 기업을 부흥시키는 것이고 또한 진나라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애공은 내심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그저 신포서에게 듣기 좋은 말로, 


"네가 길에서 수고했는데 먼저 휴식부터 하고 나서 보자."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자 신포서는 물러나오려 하지 않고 계속 간절히 진언하였고 진애공도 역시 듣기 좋은 말만 하다가 마지막에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자 신포서는 조당의 벽에 붙어 서서 소리내어 통곡하였는데, 곡성이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고 계속 통곡만 하다가 7일 만에 땅에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진애공은 감동되어 말하기를, 


"초나라에 이렇게 충성하는 애국지사가 있는데 부흥하지 못할 이유가 없거늘, 내가 어찌 도와주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서 친히 나와 신포서의 머리를 받들고 급히 물을 먹이고 약을 써서 그를 깨게 한 다음 그를 향해 '무이'의 시를 읊어 주었다. '무이'는 진나라의 시로서, 구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모극(茅戟)을 준비함은 

그대와 함께 한 원수를 치기 위함이고 

내가 갑병(甲兵)을 훈련함은 

그대와 함께 거사하기 위함이네. 


이것은 바로 무기를 들고 공동의 적과 함께 싸우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신포서는 진애공이 출병하기로 결정한 것을 알고 아홉 번 절하여 최대의 사의를 표하였다. 


마침내 진나라에서는 양원 대장을 파견하여 전차 500승(약 4만명의 병력)과 초나라의 잔여 군사를 연합하여 단번에 오나라 군대를 연패시켰다. 


오왕 합려는 그의 형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기회를 타서 왕위를 찬탈하려 하였으므로 합려는 싸움을 그만두고 군대를 물리어 내란부터 막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초나라에서는 오나라에 빼앗겼던 실지를 모두 되찾았다. 초소왕은 이때부터 정치를 개량하고 현명한 인재를 중용하였기에 초나라는 차츰 강국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18. 진화타겁(?火打劫): 내우외환을 이용한다. 


'진화타겁'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약탈을 한다는 뜻인데, 의역하면 남의 불난 집에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친다는 것, 즉 적의 위기를 틈타서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약점뿐만 아니라 적국 또는 상대방의 내면적인 허점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 


초나라의 장왕(壯王)은 진(陣)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첩자를 보내어 그 허실을 살펴보게 했다. 


이윽고 첩자가 돌아와 보고했다. 


"아직 진나라를 공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장왕이 물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성벽은 높고 해자(垓字)는 깊으며 방비는 철통과도 같습니다. 게다가 군사들이 먹을 군량과 군마들이 먹을 마초(馬草)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진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음, 그렇다면 진나라를 칠 절호의 기회는 바로 지금이군." 


"그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진나라에 멸망의 징조가 보이기 때문이네." 


"?……" 


"그래도 모르겠는가. 진나라와 같은 소국이 그토록 전쟁 준비를 했다면 필경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원망이 비등하고 있을 걸세. 또 그 나라에서 그처럼 성벽을 높이 쌓고 물길을 깊이 팠다면 많은 백성들이 심한 노역에 시달렸을 것인즉, 그들은 모두 피로에 지쳐 마음속으로 깊이 원망하고 있지 않겠나." 


과연 장왕은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쳐 대승을 거두었다. 

 

19. 차도살인(借刀殺人): 우군을 이용한다. 


'차도살인'을 직역하면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뜻으로, 자기의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모순을 이용하여 교묘히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격파하는 계략을 말한다. 


삼국 시대 예형이 조조를 비방하자 조조가 공융에게 말했다. 


"예형은 소인으로 예의를 모른다. 그를 죽이는 것은 참새나 쥐를 죽이는 것보다 쉽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그를 죽이면 틀림없이 나에게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없다는 평판이 나게 될 것이다. 형주의 유경승은 생각이 좁고 성질이 급한 자이니, 그를 시키면 예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조조는 즉시 예형을 강제로 말에 태워 기병 두 사람을 호위시켜 유경승에게 보냈다. 그후 과연 유경승의 부장 황조가 거만한 예형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20. 차시환혼(借屍還魂): 무엇이나 이용한다. 


'차시환혼'을 직역하면 주검을 빌려 영혼을 찾아온다는 뜻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이용을 해서 이쪽의 뜻하는 바를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원래의 뜻은 이미 죽은 자가 다른 형식을 빌려 나타난다는 비유이다. 


조조가 회남의 원술과 싸울 때였다. 조조는 은근히 마음의 근심이 컸다. 진중에 준비한 군량은 많지 않은데 수하 장졸 17만이 날마다 소비하는 양식은 막대한 수량이었고, 모든 고을이 또 가뭄으로 말미암아 이루 뒤를 대지 못한다. 


조조는 군사를 재촉하여 급히 싸우게 했으나 원술의 군사가 성문을 굳이 닫고 나오지 않았다. 


조조는 손책에게 글을 보내어 양미 십만 곡을 얻어 왔다. 그러나 그것쯤으로는 각영(各營) 장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수가 없었다. 


관량관(管粮官) 임준의 부하 왕후(王?)가 들어와서 조조에게 품했다. 


"군사는 많고 양식은 적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반으로 줄여 주어, 우선 일시 급한 것이나 면하도록 하여라." 


조조가 분부하니, 왕후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반으로 줄여서 주면 군사들이 원망을 할 터인데, 그것은 또 어찌 하시겠습니까?" 


"다 좋은 방법이 있으니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여라." 


왕후는 분부대로 각영 군사에게 1인당 열 말씩 주기로 된 쌀을 닷 말로 줄여서 분배하였다. 


조조가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각영으로 돌아다니며, 군사들이 무어라고 하나 들어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고하되, 


"모두들 승상께서 우리를 속이신다고 불평하지 않는 놈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왕후를 장중으로 불러들였다. 


"양미를 적게 받고 지금 군사들이 모두 불평이란다. 내 네게서 물건 한가지를 빌려, 그것으로 군심(軍心)을 진정시킬까 하니, 네 부디 아끼지 말고 좀 빌려 다오." 


왕후는 기이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승상께서는 무슨 물건을 쓰시려고 하십니까?" 


"아무 다른 물건이 아니라 네 머리다." 


왕후는 깜짝 놀랐다. 


"소인은 분부대로 거행하였을 뿐이옵지 아무 죄가 없습니다." 


"나도 네게 죄가 없는 것은 안다만은, 다만 너를 죽이지 않으면 군심이 변할 것이라,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너 죽은 뒤에 네 처자는 내가 잘 돌보아 줄 것이니 아무 염려 말아라." 


왕후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할 때, 


"여봐라! 이놈을 곧 끌어내어다 참하여라." 


조조는 도부수를 불러 큰소리로 호령했다. 


이윽고 왕후의 목을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놓은 다음, 방을 내어 군중에 고시하게 하였다. 


'왕후가 함부로 관량을 훔쳤기로 삼가 군법으로 다스리노라.' 


이를 보자 모든 군사들이 조조를 원망하는 소리가 뚝 그치게 되었다. 

 

21. 차용시의(借用猜疑):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이용한다. 


시기심이란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른나무에 던져진 한 알의 불씨와도 같은 것이다. 


'차용시의'의 책략을 운용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시기를 잡고 바람을 빌려 불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다. 


조조는 한나라 때 권세를 휘두른 환관 조등의 양자인 조숭의 아들이었다. 조숭은 거금을 주고 태위(太尉:국방장관) 자리를 샀을 정도로 긁어모은 재산이 대단했다. 그런 집안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면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빗나가기 마련인데, 조조도 예외는 아니어서 못된 짓은 골라가며 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조조는 천품의 재치가 엿보이고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하도 어른 말을 안 듣고 방탕을 일삼기에 삼촌이 늘 잔소리를 하고 자기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하는 데에 앙심을 품은 조조가 한 꾀를 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그 삼촌을 만나자 조조는 갑자기 얼굴을 씰룩거리며 길에 쓰러졌다. 


깜짝 놀란 삼촌이 달려와 웬 일이냐고 물으니 조조가 짐짓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풍을 맞은 것 같아요." 


삼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형인 조숭에게 달려가 조조의 일을 고했다. 


조숭이 놀라서 급히 조조를 불러 물었다. 


"네 삼촌이 네가 풍을 맞았다고 하던데 괜찮으냐?" 


그러자 조조는 자못 슬픈 듯이 대답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삼촌이 늘 저를 미워해서 또 지어내신 말이겠지요." 


이런 경우는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조숭은 그 다음부터는 자기 동생이 조조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았다. 

 

22. 폄우보중(貶沛保中): 나무람을 칭찬 속에 담는다. 


중상(中傷)은 꼭 남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중상법도 있으니 소위 '나무람을 칭찬 속에 칭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상대방에게 죄를 짓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도리어 감사를 받기까지 한다. 


'한비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복인과 왕자 중의 한 사람이 화목하지 못했다. 이 왕자는 생모의 지위가 비천하였기 때문에 그의 마차를 끄는 말까지도 몹시 여위었다. 그래서 복인은 곧 대왕에게 진언했다. 


"그 왕자가 매우 가련합니다. 말까지도 그렇게 여위었습니다. 그에게 말먹이를 더 줄 수 없겠습니까?" 


왕은 물론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복인은 바로 그날 밤 가만히 마구간에 불을 놓았다. 왕은 그것은 틀림없이 그 왕자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왕자를 처벌하였다. 

 

23. 포전인옥(抛廛引玉): 벽돌을 주고 옥을 바꾼다. 


'포전인옥'의 이야기는 당나라의 현종 개원년간의 진사 상건이 쓴 '상건집'에서 나왔다. 


상건은 당대의 이름난 시인 조가의 시를 십분 앙모하였다.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조가가 오나라로 가서 영음사를 유람한다는 소식을 수소문하여 듣고, 자기가 먼저 가서 영음사 암벽에다 두 구절의 시를 써 놓음으로써 조가의 시흥을 불러 일으키기로 하였다. 


얼마 안되어 과연 조가가 그곳으로 와서 완성되지 못한 시가 있는 것을 보고 곧 그 뒤에다 두 구절을 더 써서 한 수를 완성시켰다. 


속성한 두 구절은 원래의 두 구절보다 훨씬 나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상건의 이런 작법을 "벽돌을 던져주고 옥을 바꾸어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포전인옥'의 원래 목적은 자기가 아직 옳고 명확하고 훌륭한 견해가 없을 때는 먼저 의견을 발표함으로써 남들로 하여금 좋은 견해를 내놓게 유도한다는 것이다. 또는 타인의 의도와 견해를 유발하기 위하여 자기가 먼저 미끼가 되는 어떤 의견들을 내놓음으로써 자기의 목적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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