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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국을 빛낸 사람들

십경도2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청년시절)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십경도2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청년시절)

정창섭, 문학진



이 순신이 스무 살이 될 즈음, 북쪽 변경에는 오랑캐들이 넘나들며 우리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 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순신은 겨레의 방패가 되어 나라를 구하리라 결심을 하였다. 당시 무언의 길이 비록 문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이 순신은 28세가 되던 해 8월, 훈련원에서 실시하는 별과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이순신은 시험장에서 무예시험 중에 말을 타고 달리다가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이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죽었구나.”하고 놀라고 있을 때, 이 순신이 한발로 일어나 곁에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매고 걸어 나와 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순신이 얼마나 자조ㆍ자립 정신이 강했던가를 보여준 일화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순신의 일대기를 보면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자조ㆍ자립의 정신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순신은 그러한 성품과 신념 때문에 32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였고, 45세에 정읍 현감, 47세에 전라 좌수사의 벼슬에 올랐다. 사대부 제도가의 자손들이 30세 안팎에 큰 벼슬에 올랐던 사실과 비교하여 출세가 상당히 늦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순신의 죽마고우인 유 성룡(柳成龍)은 그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 “조정에서 공을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가 없어 급제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출세하지 못했다.”고 술회하였다.


이 순신은 자기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들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율곡 이 이가 유 성룡을 통해 이 순신을 만나보기를 청하였고, 유 성룡도 만나보라고 권한 사실이 있었으나, 이 순신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율곡과 유 성룡은 이 순신의 인격에 감탄하였다. 이 순신은 일가 친척의 힘을 빌어 벼슬길에 오르는 것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후에 이 순신은 32세가 되던 1576년 2월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벼슬길에 나갔고, 이듬 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이 순신이 37세 되던 해, 수군생활의 시작이었던 발포 만호로 있을 때, 상관인 수사 성 박이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큰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나라의 물건이니 벨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한다.


이에서도 공의 바르고 옳은 일이면 행하고 그른 일이면 대항하여 싸웠던 정의의 정신을 또한 찾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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