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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국을 빛내는 사람들

“콘텐츠의 출발은 책… 안 팔려도 가치 있는 책 계속 만들 것” = [세계초대석]


[세계초대석]

“콘텐츠의 출발은 책…

안 팔려도 가치 있는 책

계속 만들 것”


‘37년 외 길’ 김종수 한울아카데미 사장


“비록 잘 팔리진 않는다 해도 가치 있는 책을 만든다면 좋겠지요. 모든 콘텐츠의 출발은 책입니다. 책을 제대로 평가하고 제대로 만드는 나라만이 콘텐츠 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출판산업에 대한 개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울총서’ ‘한울아카데미’ ‘열린글’ 시리즈로 유명한 김종수(61) 한울아카데미 사장은 ‘인기가 없다 해도 꼭 필요한 책’을 만든다. 그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역사학, 영상예술, 자연과학, 의학 등 폭넓은 영역의 서적을 37년간 묵묵히 만들어 왔다. 출판업계에서는 ‘가치 출판을 지향하는 전문가’로 불린다. 26일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한울아카데미에서 김 사장을 만나 ‘가치 출판’에 대해 들어봤다.


―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인문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사람은 마땅히 기본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기본이란 우리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모든 것이 설명된다. 바로 ‘인문학’이다. 지난해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결국 ‘사람의 기본’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초래된 것 아닌가.”

김종수 한울아카데미 사장은 “유럽이 세계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발달한 인쇄술을 기반으로 책을 만들고 유통했기 때문”이라며 “책을 제대로 평가하고 만드는 나라만이 콘텐츠 강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상윤 기자


― 인문학 견문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날 세계 문화의 중심지는 유럽이다. 유럽이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15세기 이전까지는 유럽의 일반 지식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쉽게 접하지 못했고, 부유층과 극소수 지식인만이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책이 그리스어로 필사된 탓에 읽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필사된 책은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값이 매우 비쌌다. 그러다 15세기 넘어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하면서 책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모두가 평등하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책을 유통하고 접한 것이 오늘날 유럽이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된 근원이었다.”


― 책의 중요성은 알면서도, 

    책 읽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사람들에게 똑같은 시간을 주고 책과 영화 중 무엇을 보겠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를 보겠다고 답할 것이다. 책 읽는 자체가 노동이기 때문이다. 20여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절대 책 읽는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학생들을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학생들의 책 읽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에게 아무리 책을 읽으라고 권해도, 어차피 읽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필요한 책을 읽으라고 가르친다.”


―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출판산업 불황의 근본적인 원인 아닌가.

“출판의 산업적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독서의 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대학에 입학하고 한 학기 만에 중퇴했다. 그가 대학을 떠나 가장 먼저 한 일은 글꼴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온 것이 아이폰이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글자를 어떻게 볼 것인지 연구한 끝에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오늘날 책이 팔리지 않는, 책을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스마트폰이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점차 책을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덕분에 글을 많이 읽기도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독서를 안 한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다만 책이나 스마트폰이라는 읽는 수단을 떠나, 무엇을 읽는지에 대한 것이 중요하다. 그 점에서는 스마트폰이 책보다 뒤지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등을 통해 장르소설을 접하는 경향이 강하다.”


― 그래도 책이 많이 팔려야 출판산업이 되살아나지 않겠나.

“한국에서는 단순히 책을 많이 팔고, 많이 읽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출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흔히 출판산업이 어렵다고 하는데, 책은 애초 ‘안 팔리는 상품’이다. 앞서 말했지만 책을 읽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겠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좋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고 아르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 베스트셀러는 아니었다. 단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했으며, 필요한 사람들이 책을 읽었을 뿐이다. 책은 필요한 사람들이 보는 것이고, 출판사는 그 사람들과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책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독자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출판산업의 좋은 본보기가 있다면. 

“독일은 세계 최고의 출판강국이다. 출판에 있어서 독일과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다. 독일의 출판 경쟁력의 원천은 콘텐츠에 있다. 우리는 우리 책을 해외에 많이 파는 것이 산업적으로 유리하다고 본다.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다. 하지만 독일은 해외에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독일이 콘텐츠를 가장 많이 사들이기 때문에 훌륭한 제작자들이 독일로 모여든다. 그것이 바로 독일의 출판 경쟁력인 것이다. 세계 최대 도서전이 매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배경이다.”


― 출판강국 독일의 출판 경쟁력이란.

“언론도 아동도서를 해외에 판매한 것을 대서특필하곤 한다. 물론 좋은 일이며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세계 각국의 유수 출판사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몰려와 자기들이 팔 만한 것들을 내놓으면서 우수한 콘텐츠를 선보인다. 독일은 이를 전수받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한울은 유독 ‘돈 안 되는 책’만 내는 것 같다. 

“한울이 내는 책은 대부분 하드커버(양장본)다. 요즘은 책의 원가와 무게를 절감하기 위해 페이퍼백으로 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본래 책은 하드커버로 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대부분의 책이 하드커버로 나온다. 그만큼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한울에서도 하드커버로 책을 내면서 일반 책에 비해 더 많은 돈이 든다. 그만큼 가치 있고 소장할 만한 책을 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 대형 서적도매상 송인서적이 도산했다. 

    ‘제2의 송인서적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은.

“송인서적의 부도는 일정 부분 예견된 사건이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출판 유통구조가 부실한 곳이 드물다. 출판산업이 호황을 타지 않는 한 제대로 운영될 수 없는 구조다. 일반적으로 책은 출판사에서 도매상을 거쳐 서점에 진열된 뒤, 다시 출판사로 반품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적게는 20%, 많게는 50% 이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도매상이 책값을 처음부터 어음으로 지불한다. 도매상이 출판사에서 책을 가져간 뒤 부도가 나면 출판사는 책값도 받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여기에 도매상 자체의 인건비도 따로 든다. 독일의 경우 출판사와 도매상, 서점이 책값을 현금으로 거래한다. 또 도매상이 출판사에서 책을 가져간 뒤 보름 이내 책값을 지불한다. 반품 비용 부담도 우리와 다르다. 책이 반품되는 것에 대한 비용 부담을 출판사와 서점이 함께 지는 것이다.”


― 도서정가제가 전면 시행된 지 2년 반 정도 지났다. 

    어떻게 보는가.

“미국은 한국의 도서정가제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우리 정부도 도서정가제를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3년마다 연장하기로 되어있다). 아마 출판사들의 반발에 대비해 적절한 당근을 제시할 것으로 본다. 문제는 도서정가제를 시행하지 않는 국내 출판사들의 경쟁력이다. 출판시장은 제국주의자들이 탐내는 시장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서정가제가 연장되지 않으면, 그 틈을 타 탄탄한 콘텐츠 경쟁력으로 무장한 미국이나 유럽 유명 출판사들이 국내로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 영어 기반의 콘텐츠 경쟁력과 가격 경쟁력을 가진 그들이 한국 시장에 진입한다면, 국내 출판사들은 생존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 새 정부에 출판계를 위해 건의할 내용이 있다면.

“책은 필요한 사람이 보는 것이다. 책값을 지불할 생각이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면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출판사가 도서관에만 책을 공급하면 망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베스트셀러를 내서 수익을 내야 운영이 되는 구조다. 출판사가 도서관에만 책을 공급하고도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그렇게 해야 출판사는 도서관에 공급할 수 있는 양질의 책을 생산해 낸다. 영국에서는 도서관에서 빌려준 책에 대한 저작권료를 저자에게 지불하는 PLR(Public Lending Right)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는 책 한 권 가격으로 가치를 평가하지만, 영국에서는 책 읽은 사람 수만큼 가치를 평가한다. 우리나라의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출판사가 생존을 위해 영업에 치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출판를 상업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대담=류영현 문화부장, 정리=권구성 기자 ks@segye.com

김종수 한울아카데미 사장 약력  ●서울 출생(61)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한울아카데미 설립(1980)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2002∼2008) ●(사)출판유통진흥원(2009) 회장 ●(재)한국출판연구소 이사장(2010) ●성공회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