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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s that Changed the World" , "세상을 바꾼 사진들" '마릴린 먼로'


"Photo that Changed the World"


"세상을 바꾼 사진들"

 



Marilyn Monroe (마릴린 먼로)

 


by Peter Stepan

(페터 슈테판)


 



 

01.【 세상을 바꾼 사진 】


 페터 슈테판이라는 사진작가가 20세기를 정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진들을 모아서 <세상을 바꾼 사진>이라는 책을 펴냈다.

『세상을 바꾼 사진』에는 20세기의 역사적 신기원을 이룩한 사건들과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건들을 매우 강렬한 방식으로 포착한 사진 85장과 촬영 당시의 상황, 사진들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의의가 담겨 있다.

 세계적 사진평론가 비키 골드버그(Vicki Goldberg)가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고 "사진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 영향력을 온 사방으로 퍼뜨릴 뿐이다!" 라는 그의 말을 증명하듯, 퓰리처상을 수상하거나 '뉴욕 타임스', '타임', '라이프' 등의 표지를 장식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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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5일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가 타계한지 꼭 52년이 되는 날이라고 한다. 1926년생이니까 아직 살아있다면 88살이다.

 마릴린 먼로야 말로 오늘날의 그 어떠한 스타 보다 더 많은 실력과 능력과 명성을 가진 배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는 그녀에 대한 사진이나 라이프 스토리, 그녀를 다룬 영화와 다큐멘타리는 그녀가 '살아서의 전설, 죽어서의 신화'로 미화되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마침 '세상을 바꾼 사진' 에서도 그녀의 유명한 사진들을 소개하였다. 삶이나 죽음과 상관없이 대중에게 여전한 호기심을 일으키고 변치않는 사랑을 받으며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의 지존으로 남아있는 여배우 마릴린 먼로,

 미국인이 가장 환생시키고 싶은 사람 1위에 뽑힌 마릴린 먼로,

 '세상을 바꾼 사진' 에서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그녀의 멋진 사진들을 추려서 담아 봅니다.


 

♣ 제 목 : 마릴린 먼로 이야기 



02.【 어린시절 】


 

   

   


< 마릴린과 어머니(우측)사진과 어린시절 모습 >


 마릴린 먼로의 인생을 37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펴보면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스타였지만 동시에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다.우선 출생부터가 비극적이다.

 먼로는 1926년 6월 1일 LA 에서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en)이란 이름으로 노르웨이인 아버지 에드와드 모텐슨(Edward Mortensen) 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글래디스 먼로(Gladys Monroe)' 사이에서 태어났다.



03.【 고아원 시절 】


 





 

 그녀의 어린시절은 불행하기 그지 없어서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전에 가정을 버렸고, 어린 노마 진은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했던 어머니로 인해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하는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04.【 첫번째 결혼 】




 

 항상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던 그녀는 13세에 에머슨 주니어 하이스쿨(Emerson Junior High School)에 입학하면서 매력적인 외모로 학교 내 남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 노마 진은 16살 때인 1942년 6월 19일 경제적인 이유로 위탁가정의 아들인 제임스 도허티 (James Dougherty)와 결혼하지만 도허티는 곧 해병대에 입대한다.


 

05.【 모델시절 】


 


 

 결국 혼자 남겨진 노마 진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1945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버 (David Conover) 를 만나면서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남성들을 위한 성인 달력사진을 비롯해서 훗날 문제를 일으키는 사진들을 찍었다. 즉 무명시절 누드로 찍었던 달력사진이 공개되어 곤혹을 겪었다.

 


 

< 문제의 성인용 카렌다 >





< 카렌다에 실린 누드화 >




< 플레이 보이 창간호 표지 >



< 플레이 보이지에 실린 누드화 >



 하지만 배고픔 때문에 사진을 찍었을 뿐이라고 당당히 밝혀 오히려 이 사건은 먼로를 당시 당대의 섹시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그 후 그녀는『플레이 보이』『라이프』『포커스』를 비롯 다양한 잡지의 표지모델과 핀업걸로 활약했다.




 
< 오직 '샤넬 넘버 5' 만 입고 자는 마릴린 먼로 >



 어느 기자들과의 인터뷰 내용중, "육체는 감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라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기도 하는 한편, "What do you wear to bed ? (밤에 무엇을 입고 자느냐 ?)"는 질문에 "I only wear Chanel No.5(오직 샤넬 넘버 파이브)" 라고 대답하여 질문하는 기자들의 넋을 빼놨던 코멘트는 전설적인 코멘트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일을 반대하던 첫 남편 도허티와 4년만에 이혼을 하게된다.

 




< 한국에서는 60년 후에나 유행한 배꼽티의 원조 >








 

 이어서 모델활동을 계속하던중 20세기 폭스사 사장의 눈에 띄었다. 강한 인상을 받은 사장은 Norma Jeane 이라는 이름 대신에 어머니의 결혼전 성인 먼로를 따서 Marilyn Monroe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헐리우드로 온 후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후 우리가 잘 아는 마릴린 먼로의 인생을 시작하게된다.

 1948년에 Columbia Pictures 로 옮긴 몬로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을 하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노래, 춤과 연기 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헐리우드에 온 초기에 여러가지 면에서 먼로는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06.【 배우시절 】


 

 

 그러다 만난 사람이 바로 헐리우드의 거물급 인사 조니 하이드 (Johnny Hyde) 이다. 조니 하이드는 마릴린 먼로보다 31살 연상이었지만 먼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몇안되는 남자중에 하나였다.

 이후 먼로는 조니 하이드의 도움으로 헐리우드에 정착하게 되며, 1950년 아카데미상에 무려14개 부문의 후보작이 되었던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 과 1953년의 '나이아가라(Niagara)'를 비롯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Gentlemen Prefer Blondes)'와 '백만장자와 결혼 하는 법(How To Marry a Millionaire)'이 한꺼번에 히트를 하였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주제곡을 직접 부르는 장면>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이자 동시에 가수로도 활약했다. 1954년 서부극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의 주제곡을 직접 부르며 출연함으로써 그녀는 노래하는 배우로 영화계뿐 만아니라 팝음악계까지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전 세계적인 거물이 되어 있었다.





 또한 1957년 작품인《뜨거운 것이 좋아》로 골든 글로브상 여우 주연상을 받은 그는 1950년대를 주름잡는 세기의 섹스 심벌(sex symbol) 스타가 되였다.



07.【 조 디마지오(Joe Dimaggio)와의 두번째 결혼 】



 



 세계를 유혹하는 섹스 심벌 배우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1954년2월,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인물인 조 디마지오(Joe Dimaggio 1914-1999)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메이저 리그의 스타 조 디마지오.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웠고 메이저 리그 MVP를 세 번씩이나 차지했으며 헤밍웨이의 고전 <노인과 바다>에도 등장하는 불세출의 스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마릴린 먼로와 결혼한 순간 "대스타 디마지오"보다는“먼로의 남편” 취급을 감수해야 했다. 별이란 더 밝은 별 앞에서는 그 빛꼬리를 내리는 법.


 

08.【 한국방문 】


 


 

 이 스타 부부가 신혼여행지로 택한 것은 일본이었다. 초청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이 거물 스타 커플의 일본 방문에 전국이 들썩였다. 그야말로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신혼을 즐기는 이 커플 앞에 미군 장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조 디마지오 부부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지금도 한국에는 많은 미군들이 고생을 하면서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오신 김에 한국을 방문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 디마지오는 "우린 지금 신혼여행 중입니다" 라고 정중히 거절의 멘트를 날렸다. 이때 미군 장교의 반응은 불세출의 야구 스타 체면을 납작하게 만들고 말았다.“저는 부인께 말씀을 드린 겁니다만.”마릴린 먼로는 신혼여행지에 남편을 남겨 두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1970년 마포대교건설과함께 사라진 여의도비행장>



 1954년 2월 16일 당시 먼로가 입국했던 여의도비행장에는 그를 환영하기 위해 미군의 하늘같은 장성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그녀가 왔다.“미모의 여왕"을 직접 눈앞에 보고자 비행장에 모여든 약 6백여명에 달하는 사병들의 흥분된 모습은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루었다.

 군복을 입었으나 와이셔츠 단추를 절반이나 끼지 않고 젖가슴이 보일랑말랑 하는 것이 사병들의 흥분을 더욱 돋우는 것 같았다. 이후 미공군이 주둔하고있던 대구 동촌비행장(현 대구공항)과 포항의 미해병1사단등 4일간 머므르며 위문공연을 하였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군인들을 위해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고 춤을 췄던 먼로의 당시 모습은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리고 위문공연 내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그 기억이 그녀가 "가장 인상깊었던 방문지는 한국”이라고 회고하게 만들었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미공군부대 방문시에는 동촌비행장으로 
먼로를 환영하기 위해서 백성희씨와 최은희씨가 마중을 나갔었다>


 

09.【 아서 밀러(Arthur Miller)와의 세번째 결혼 】


 

 


 

 신혼여행 중 아내에게 버림받은(?)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은 10달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연예계 생활을 원치않던 조 디미지오는 결국 몬로와 이혼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아끼고 도와주고 사랑하는 남자로 남았다.

 조 디미지오와 이혼한지 2년이 안되서 “세일즈맨의 죽음”의 저자인 당대 미국 최고의 지성인 아서 밀러(Arthur Miller)와 1956년 07월1일 세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신적으로 서로를 고갈시켰으며 육체적으로도 병들게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별거를 거쳐 1961년에 이혼을 했다.

 그 이후에 또 프랑스최고의 인기 배우겸 가수인 이브몽땅과 영화촬영 중 사랑에 빠진 사건은 전세계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10.【 케네디와 먼로 】


 


 

 마지막에는 권력의 최상층 인물들과의 교제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과 또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의 염문설도 있었다. 이런 스캔들때문에 케네디 정부에서 마릴린 먼로를 죽였다는 의혹은 멈추지 않고 있다.

 여하튼 아서 밀러와의 세 번째 결혼이 파경을 맡은 후 먼로는 약물 중독과 불안과 우울증을 보이면서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두 번째 남편이었던 조 디마지오가 다시 마릴린 먼로에게 찾아와서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11.【 녹색 수의 】


 






 

 그런데 재결합을 목전에 앞두고 극심한 조울증 증세를 보이던 그녀는 1962년 8월5일 오전, LA 자택의 침실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이 되었는데, 전날 밤의 약물 과다복용이 죽음의 원인으로 공식 발표가 되었다. 하지만 자살이었는지 타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먼로의 죽음에 얽힌 갖가지 추측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12.【 먼로의 장례식 】


 






 

 참고로 디마지오는 그녀가 살해당했다고 굳게 믿었으며 그 때문에 평생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고 한다. 디마지오가 전 남편의 자격으로 먼로의 장례식을 주관하게 되는데 아주 엄숙하게 진행이 된다.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디마지오는 20년 이상을 매주 두번씩 그녀의 무덤앞에 장미꽃을 가져다 놓았고 1999년 숨을 거두기 전에 “이젠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군”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3.【 묘지 (납골당) 】



<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전경 >







< 우측벽면 중앙이 마릴린 먼로의 묘임 >



 


< 지금도 그녀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



 현재 마릴린 먼로는 LA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Westwood Village Memorial Park)‘에 묻혀 있다. 이 곳의 대부분은 화장으로 처리되고, 유명 인사임에도 다들 조그마한 평판의 비석이 대신하고 있다.

 하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본래 마릴린 먼로 무덤(유골함) 윗자리에 리처드 폰처라는 남성이 묻혀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주택 구입비 마련을 위해서 남편을 이장하고 그 묏자리(유골함)를 경매로 내놓으면서 '마릴린 먼로와 함께 영원히 잠드세요'라는 홍보를 했답니다.

 얼마에 경매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450만 달러, 약 46억원에 경매가 되었고, 1992년에 이미 플레이 보이 창간자인 휴 헤프너는 7만 5천 달러, 약8천만원에 마릴린 먼로의 옆자리를 사두기도 했다.


 

13

【 마릴린, 앤디 워홀 (Marilyn, Andy Warhol) 】


 




 

 마릴린먼로는 죽어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The LA Times 신문에 의하면, 우리는 앞으로 그녀의 모습을 더 많은 곳에서 볼 것이고 그녀를 더 자주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꺼지지 않는 그녀의 인기를 이용한 마켓팅이 점점 활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유명작가들이 생전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필름, 먼로가 표지모델로 나온 잡지, 가수로서 취입한 음반, 누드 캘린더, 우표, 엽서, 책과 영화포스터, 그녀가 소장했던 보석과 장신구, 신었던 신발, 애용했던 화장품, 그녀의 새로운 패션, 그녀의 이름이 들어간 와인 등,

 50년 전 타개한 여배우가 현재의 문화와 공공적 가치로 사후에도, 마이클 잭슨과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서 세번째의 고소득자라 한다. 이 모든 소득은 자선단체에서 관리하고있다.


 






 

 2013년 4월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도 열렸던 앤디 워홀전. 팝아트의 거장, 팝아트의 선구자, 라고 불리는 앤디 워홀은 1962년 마릴린 먼로가 죽은 뒤 3개월 동안에 20장이 넘는 먼로의 그림을 그렸는데, 앤디워홀의 작품 속 마릴린의 이미지는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나이아가라>(1953)의 배우 프로필 사진을 차용한작품이다.

 이 작품은 특별히 정교한 기술을 쓰지 않고 스크린 인쇄를 한 것이며, 다만, 작품에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하여 색이 밖으로 삐져 나오도록 하였다. 즉,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하였고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하였다.

 이 작품은 몇해전 뉴욕에서 경매에 출품 되기도 하였는데 경매예상가 가 150억 이였다고한다.


 

15.

【 '영원한 마릴린(Forever Marilyn)' 동상 】


 






 

 2011년 7월에 미국 시카고 한복판 미시간 애비뉴(Chicago on Michigan Avenue) 의 파이오니어 광장(Pioneer Court)에‘포에버 마릴린(Forever Marilyn)’이라는 이름의 8미터 높이의 초대형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 작품은 영화‘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의 유명한 장면인 지하철 환풍구 위의 마릴린 먼로를 조각가 J. 슈어드 존슨(J.Seward Johnson)이 약 8m 높이로 만든 조각상이다.




 

 영화 7년만의 외출에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인 몬로가 뉴욕의 지하철 환기통위에 서있는 장면이 나온다. 지나가는 지하철 바람은 공기통을 빠져나와 그녀의 하늘하늘한 흰색 드레스를 속옷이 보일 정도로 날린다.

 촬영 현장에 있던 남편 디마지오는 화가 치밀어 그 자리를 떠났고 결국 몬로와 이혼을 결심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바람에 들어 올려지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이 포즈는 아직도 마릴린 몬로 하면 생각나는 그녀의 심벌 트레이드마크 가 된것이다.

 이 조형물이 설치된 후 '선정적이다' '상업적이다' '성차별적이다' 라며 비난도 크게 일고 있으나, 이 동상 제작사인 부동산회사 젤러 리얼티 그룹은 "시민들에게 마릴린 먼로의 추억을 심어주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광객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떻든간에 이 동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릴린 먼로'를 보려고 주말이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결국 '포에버 마릴린(Forever Marilyn)' 조각상은 10개월 정도 전시된후 캘리포니아의 휴양 도시인 '팜스프링스 (Palm Springs)'로 옮겨졌고, 다시 이제는 팜스프링스가 아닌, 뉴저지주 '헤밀턴'에서 전시되어진다고 한다.

 슈어드 존슨 이 만들어서 유명한 조각작품이 하나 더 있다. 제2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설치된 ‘간호사와 키스하는 수병’의 동상 이 있다.








 65년 전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VJ- Day' <Victory over Japan>를 기념하여 세운 거대 키스하는동상인데 전쟁을 끝내고 귀환한 한 수병이 갑자기 간호사를 끌어안고 진한 입맞춤을 하는 장면으로 라이프지 사진기자 앨프리드 아이젠스타트(Alfred Eisenstaedt)가 촬영한 이 사진은 잡지 'LIFE'에 실리면서 종전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동상 작품명은 'Unconditional Surrender(무조건 항복)' 으로 이 조각상 역시 미국내 여러지역과 이태리 시비타베치아 (Civitavecchia)에도 전시돼있는 사진이 소개되고 있는데 동일작품이 일정기간씩 이동전시되거나 모조품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