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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알파벳으로 인문학 풀어가기/惠綱崔漢綺思想과 한마음

최한기-경험한 바를 기초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줄 안다면....


최한기


경험한 바를 기초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것


생각할 줄 안다면.... 



최한기(崔漢綺1803
 ~ 1879)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사상가이고자는 운노(芸老)며, 호는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

1803 개성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습니다어려서 종숙 최광현의 양자로 들어갔고 1825 진사 시험에 급제한 일이 있지만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습니다가세가 넉넉한 양부의 덕택으로 중국에서 발행한 책들을 수입하여 이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보냈습니.

일찌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접하지 못한 과학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동양 철학 서양 과학을 접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철학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의 학문은 자연과학적 사유를 사회과학 인문학의 영역에까지 두루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1. 사상

순조 2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심했습니다. 그가 살던 19세기 실학의 특색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라든가 이용후생(利用厚生) 대신 금석(金石고증학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조가 주류를 이루던 때입니다. 그의 철학 사상은 바로 이러한 실사구시의 실증 정신을 이어받고 이루어진 것으로서, 조선 후기 실학 사조의 마지막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실증 정신은 우선 실감할 수 없는 이()보다는 실감할 수 있는 기()를 택ᄒᆞ게 됩니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서 유기(唯氣)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형(無形)하고 기는 유적(有跡)한 것이어서 그 적()을 따르면 이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기론의 입장으로부터 그는 공허한 명목(名目)에 얽매이지 않고 알찬 내실(內實)에 착안하는 일종의 유명론(唯名論)의 사상을 싹트게 했습니다. 즉 그는 "()이라는 이름과 귀()라는 이름을 서로 바꾼다면 눈을 귀라고 부르고 귀를 눈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지만,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는 바뀌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귀로 본다고 하며 눈으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야 무슨 해()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으니, 이 유명론적 사상이 모든 명분론(名分論) 내지 형식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반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실리주의(實利主義실용주의 나아가 실증을 중요시하는 경험주의도 유명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험론을 아래와 같이 피력합니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을 만일 듣지도 보지도 못하     였다면, 종을 치기 전에 치면 소리가 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선천적인 이성(仁義禮智)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이와 같이 경험에 의한 지식 그리고 어디까지나 실용성이 있는 지식의 확충을 위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용을 힘쓰는 자가 결국 이기고 허문(虛文)을 숭상하는 자가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서양은 서로를 알아야 하며, 알기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서로를 위하여 통상의 길까지 터야 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그의 기() 형이상학의 귀결이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경험론자다운 기의 형이상학이 있습니다. 그 형이상학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으니 '대기운화(大氣運化)'론과 '통민운화(統民運化)'론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우주·자연에 관한 이론이며 후자는 인간사에 관한 이론입니다.

대기운화론이란 우주 자체가 기의 운동 변화로 자연의 이법(理法)을 구현하여 간다는 것이며, 통민운화론이란 기수(氣數)에 의하여 인간 또는 인류의 흥망 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기운화''통민운화'는 궁극에 가서 잘 조화 일치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통민운화''대기운화'에 조화 일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흥망 성쇠를 결정짓는 기수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수 극복의 사상 속에 바로 그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예나 지금이 같다 하더라도 예를 버리고 지금을 택하겠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경험 지식의 확충, 실리·실용을 위한 문호 개방 및 통상론이 모두 이 진보주의적 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최한기와 서양과학

시대의 비운에 휩쓸리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지낸 최한기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최항의 후손입니다. 그는 동서 과학 분야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서양의 발전된 사상, 과학을 조선의 구조에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생각으로 일관된 저술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쇄국은 침체된 무발전(無發展)의 원인이 됨을 지적하며 개국통상의 필요성을 용기 있게 논하기도 했습니다기독교 사상의 침입도 객과 주인의 자리를 현명하게 지키면 오히려 덕이 된다 하였습니다.

그는 가문이 몰락하고 평범한 향반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벼슬을 지속해 나갈 수 없게 되자 중인들과 어울리며 시야을 넓혀 나갔습니다서울로 무대를 옮긴 후 역관·서자·평민 출신들과 교류하며 김정호 대동여지도 판각을 돕는 한편 기존의 관념론을 탈피하고 경험철학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사고의 방법은 경험한 바를 기초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줄 안다면 누구나 자신의 생활 환경과 습관에 따라 추측하면서 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추측론이었습니다.

북경인화당에서 출판되어 중국인 사이에서도 읽혔던 기측체의(氣測體義)는 동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서양의 발전된 과학 기술과 융합하여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기측제의는 그의 저서 <신기통><추측론>을 합쳐 엮었는데 북경에서 간행된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기존의 책과 비교해 특이한 면이 있는데 활자가 호화판이고 체제가 매우 고상하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심기도설(心器圖說)에선 과학 서적을 접하며 기구의 개량에 힘썼고, 우주관이나 지구의 자전론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보인 지구전요(地球典要) 코페르니쿠스 자전 공전의 내용을 전하고자 하였지만 중국에 소개된 책을 편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얻으려면 옛 것에만 집착해선 안 되며 저마다의 가치가 있으므로 소중히 하며 인사(人事)의 바른 등용도 촉구했습니다.

평탄한 생활에서 1천여 권의 책을 집필하며 다복한 삶을 살았던 최한기의 끊임없던 저술 활동은 1970년 이후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되어 그의 삶을 통해 역사의 배경을 배울 수 있으나 현실에 적용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3. 저서

1830에서 1867까지 번역하거나 지은 책이 무려 1천여 권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책은 20여종 120여권입니다. 이들은 명남루전집(明南樓全集) 3책으로 영인본이 나와 있기도 합니다.

기측체의(氣測體義)(1836)

강관론(講官論)(1836)

심기도설(心器圖說)(1842)

지구전요(地球典要)(1857)

기학(氣學)(1857)

인정(人政)(1860)

신기천험(身機踐驗)(1866)

성기운화(星氣運化)(1867)

4. 함께 보기

김정호

실학

5. 읽을 거리

김용옥, 독기학설

김용옥, 혜강 최한기와 유교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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