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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가나다順)/천주교 바로알기

너 어디 있느냐? - 피정, 영성 자료/ 류해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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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 있느냐? / 피정, 영성 자료


류  해  욱  신부

너 어디 있느냐?


제가 나름대로 오늘 함께 나누는 강의의 제목을 “너 어디 있느냐?”로 붙였습니다. 제목이 전체 강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출발점으로 삼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붙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영성이라는 말 많이 듣고 또 쓰시지요. 그런데 이 영성이라는 말, 얼마만큼 이해하면서 쓰고 있는지요? 저 자신도 참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명쾌하게 답을 줄 수 없는 것이 마치 죄진 느낌입니다. 영성신학을 공부했다는 주제에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가? 영어로는 spirituality인데요. 한국말에 ‘영(靈)’, 영어에 ‘spirit'이 들어가는 것으로 미루어 ’영‘, 즉 성령과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어떤 관계인가?


제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일상 삶이 바로 영, 성령께서 함께 계시면서 일하시는 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성령의 이끄심을 인식하면서 바르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방법, 말하자면 어떤 길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 방법, 길이 있다면 그것이 영성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마디로 영성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 대한 제시 내지는 안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영성이라도 지도처럼 실제 지형에 따라 고도가 표시되고 방향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면 길을 안내할 수 없습니다. 한편,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우리의 삶 안에서 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행자가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식은 여행하면서 방향과 위치를 읽고 길을 헤매는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유명한 유태교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마르틴 부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이야기 하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감옥에 갇혔던 한 유대교 랍비와 간수장이 나눈 대화입니다. 깊이 사색에 잠겨 있는 고요한 랍비의 모습에 간수장이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름대로 생각이 깊었던 간수장은 랍비에게 말을 붙이고 자기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성서의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해 랍비에게 묻습니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모든 것을 다 아실 터인데 왜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시는지요? 그 물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랍비가 되묻습니다. “당신은 성서가 영원하다는 것, 모든 시대,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이 성서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좋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시대 안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네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서 너는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나날들, 네가 살아온 삶 안에서 너는 어디쯤 와 있느냐? 하느님은 당신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46년을 살아 왔는데 너는 진정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이냐?”


간수장이 자기의 나이가 언급되는 것을 듣자, 깜짝 놀라고는 온 몸을 추스르더니 랍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는 “그렇군요. 하느님께서 제게 묻고 계시는 것이군요.” 그의 가슴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부버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어떤 새로운 것을 아시기를 기대하면서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을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담이 자기 자신을, 자기의 행위를, 자기 삶의 모습을, 자기의 처지를 바라보도록 질문을 던지십니다. 성서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라면,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던지시는 물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 삶의 양식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는 것이 영성 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너 어디 있느냐?” 라는 고요하고 조용한 목소리를 대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암흑의 길을 헤매는 길 잃은 양입니다. 아담은 이 물음을 듣고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고백합니다. 모습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숨었노라고. 부끄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하느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은 우리의 인생, 삶이라는 지도안에서 마치 빨간 X표와 같습니다. (미국에서 information center에서 지도 설명) 빨간 X표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표시해 줍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알 때, 우리는 바르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궁극적으로 미래지향적입니다. 피정을 retreat라고 하지요. 후퇴이지요. 일상 삶에서 잠시 후퇴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지요. 진일보를 위한 후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너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에 직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이전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아리송하다는 것(김광석의 노래)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과 여력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답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평신도들이 겪는 어려움 내지는 물음, 내적 갈등 등을 예를 들어봅시다. 많은 평신도들이 기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기도 생활을 더 깊이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지요. 직장에서 업무에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오면 우선 피곤하니까 쉬고 싶습니다. 가족과 더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혼자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내가 레지오 단원이라고 하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주어진 과제인데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활동을 한다고 집을 비우고 나가는 것이 과연 내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히 아내로서, 엄마로서 역할을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어떻게 교회 활동 내지 나의 신앙생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역할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제가 어릴 때 아주 친하던 친구가 있는데 어렸을 적에는 성당에 아주 열심 하던 녀석인데 지금은 냉담을 하고 있다고 제게 고백합니다. 저는 그 친구가 냉담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조그만 사업을 하는데, 사업상 하루 적어도 한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상태에서 성당 다니려니까 죄의식 때문에 너무나 괴롭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내면에서 느끼는 갈등과 의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좌절과 죄의식과 혼동을 체험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나의 시간과 여력을 사용할 것인가? 복잡다단한 세상, 급변하는 세상을 사는 평신도들이 겪는 갈등은 적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은 생각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정말 그렇습니까? 수도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니까 평신도들이 겪는 어려움과는 무관한 삶을 삽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결코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지요. 다만 조금 다른 문제들을 지니거나 때로는 다른 관점에서 문제들을 대처해야 하는 것뿐이지요. 어쩌면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겪는 갈등과 어려움은 더 커다란 도전을 요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 점을 분명히 하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공의회는 교회가 더 이상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세상을 가르치는 한마디로 말해서  진리의 배분자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진리를 찾아나가는 ‘순례자’라고 표현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겪어야하는 도전들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과중한 사도직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할 일은 태산같이 많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정말 묵상 시간을 마련하기가 힘들다. 내가 일의 노예가 되기 위해 수도회에 들어 왔는가? 어떤 수도자는 성소의 위기를 느끼면서도 진정 마음을 열고 나눌 영적 동반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위하면서 기도 시간 빼먹고 공동체에 소홀할 때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산다는 것,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복음적 사랑을 산다는 것이 참 쉬운 것이 아니지요. 어느 한 면으로 치우쳐서 다른 면이 소홀히 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산다는 것이 평신도이건 수도자이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입니다.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요구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양식, 곧 영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전체적인 영성(A Holistic Spirituality)라고 합니다.


전체적인 영성이란 우리가 참으로 복음적 사랑을, 복음적인 가치를 올바르게 살아가는지를 비추어 주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완덕에 이르는 것이라면 전체적인 영성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조화를 이루면서 완덕으로 나아가는데 안내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신체를 단련하는데 위험이 따르듯이 완덕을 향해 가는데도 위험이 따릅니다. 


바른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완덕, 또는 거룩함을 추구한다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성장을 초래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겪어야 하는 인생의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만 단지 얼마동안 자신들의 닻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어디에? 교회라는 바다 안에. 다시 말해 종교를, 성숙을 체험해야 할 어른으로서의 삶의 고뇌를 회피하는 도피처로 생각하거나, 이용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니 지금도 어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잘못하면 벌을 내리시는 두려운 이미지의 하느님을 부각시키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풍요로움과 활력을 빼앗음으로써, 자기들의 권위 아래 사람들이 의존하게끔 하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교회의 지도자들, 심지어는 수도회의 장상들에게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 다시 말해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경우를 보게 됩니다.


전체적인 영성이 평신도이거나 수도자, 성직자이거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신앙과 매일의 삶을 연결시켜 나가도록 이끌 것입니다. 전체적인 영성을 통해 우리는 인간적인 것과 완덕 내지는 거룩함 사이의 괴리를 메워 나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체적인 영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인격을 도야해 나가도록 이끌 것입니다. 예수회의 유명한 역사 신학자인 휴고 라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영혼과 육체, 머리와 가슴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온전히 통합된, 다시 말해 조화를 이룬 사람이다” 건강한 영성이란 온전한 인간됨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건강한 영성 생활이란 인간적인 것을 존중해야지, 그것에 반해서 완덕이나 거룩함만을 추구하거나 신앙생활에만 전적으로 투신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영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으로 바르게 복음적 사랑을 살면서 완덕을 향해 나가면서 인간으로서 성숙하게 하는 마음을 지니게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전체적인 접근 (Holistic approach)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전체적이라는 말 최근에 영성에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적용해서 쓰는 말입니다. 예컨대, 의학, 치료요법, 인간학, 심리학, 교육 (전인 교육), 교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입니다. 이런 모든 분야에서 적용하면서 공통된 의미는 연관성, 연대성, 전체성에 대한 관심, 통합하고자 하는 원의, 크게 전체적으로 보는 시야, 주어진 상황이나 현실, 실재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측면들을 모두 연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전체적인 접근이라는 개념의 뉘앙스를 포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분야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의학에서 요즘 전체적인 의학(Holistic medicine)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이제 의학이 관심의 초점을 전체로서의 인간(total person)에 두고자 하는 의미이지요. 예컨대, 단지 병이 난 부위나 기능이 마비된 부분을 비인간적으로 다루는 수술, 제거, 치료 등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전체적인 건강을 위해서 어떤 장기적인 계획이 세워져야 하는가를 보는 접근입니다. 고장 난 기관을 고치는 것으로 축소하지 않고 전체로서의 인간을 다루고자 하는 열망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상담하던 학생-아버지 병원에 입원. 환자-고장 난 기계-하나의 인격체로서 다루지 않는 것에 충격, 분노) 이러한 전체 의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전문화되는 의학, 기술 진보에 따르는 비인간화되는 현대 추세에 반동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을 전체로서 본다는 관점에서 보면 동양 의학이 훨씬 더 인간적이지요. 더 조화를 생각하거든요. 전체적인 의학이 정신과 육체의 조화된 삶을 통하여 건강을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학이 관심의 초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치료보다는 예방이라는 것이지요. 건강은 적절한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개인이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봅니다. (뇌내 혁명)


심리학자들이 인간 계발, 심성계발에 전체적인 접근방식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모든 복합된 측면을 인식하고 계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융에 의하면, 참으로 성숙한 인간이란 영혼과 정신 안의 여러 측면의 통합을 이룬 사람이라고 하면서 동양의 음과 양의 조화의 개념을 말합니다. 이 통합 내지는 조화는 일생을 거친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지요. 이 과정 안에서 어떤 극적인 순간을 겪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mid-life crisis(중년기 위기)라고 하지요. 융에 따르면, 한사람의 일생의 오후에 갑자기 도전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오전에 개발되었어야 하는데 미성숙했던 부분이 노출되면서 겪는 위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위기를 오히려 전체 인격으로서 보다 풍부하게 성숙하는 계기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누구도 인간적인 성숙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성숙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육자들이 추구하는 전체적인 교육(전인 교육)은 지적 교육뿐만 아니라 감정, 정서적 교육을 함양하도록 시도합니다. 정서적 행동이 지적 행동과 마찰되거나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보다 풍부한 인격체를 형성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라고 봅니다. 정신을 개발시키는데 국한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탐구해 나가도록 이끌어 주고 어떤 문제도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고 스스로 반론을 제기해 보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나라 교육- 입시 지옥 너무나 큰 문제) 


전체적인 교육자들은 선생님들이 지식보다 정신이 더 중요하고, 정신보다 인간이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교육시키기를 격려합니다. 어떻게 감성과 지성, 상상력 등을 통합시킬 것인가에 관심의 초점을 둡니다. “미국 교육의 재창조” 라는 책을 쓴 Chales Silberman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일의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아니라 많은 교육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도록 교육되었을 뿐만 아니라 느끼고 행동하도록 교육된 인간이라고. (not intellectuals, but person educated)


신앙교육 (교리):현대의 교리교육에도 통합된 접근 방식이 요청됩니다. 단순히 교리 문답의 형식, 교리 책에 머무는 것 이상의 접근 방식이 필요. 전체적인 교리교사 (holistic catechists)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로지 전체로서의 인간,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다루는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접근 방식만이 한 사람의 믿음을 자라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믿음을 지니게 되고 자라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통해서, 교리교사들을 통해서. 이제 더 이상 예비자들에게 그리스도, 하느님, 교회에 관한 지식만 전달할 수 없습니다. 지적, 영성적 가능성뿐만 아니라 감정적, 정서적 가능성까지 개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야학 학생들과 체험 이야기)


이제 전체적인 접근 방식이라는 말에 대해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 그러면, 전체적이라는 말 영성과 연결될 때 무슨 의미인가? 감을 잡으셨으리라 생각. 전체적인 의학이 그러하듯이 전체적인 영성도 전체로서의 한 인간,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조화를 중시. 전체적인 인간 개발이 그러하듯이 전체성, 조화성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요청. 일생을 거친 성장과정이 요구. 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영성은 물음을 던집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측면, 모든 분야에서 우리를 이끄시고 사랑하시는가?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따라 사는 우리 삶의 양식이라고 할 때 우리 삶의 모든 분야가 바로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성령의 장이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과거의 어떤 영성들은 영성생활의 범위를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나의 영혼 상태에 국한 시켰습니다. 대조적으로 전체적인 영성은 나라는 인간 존재의 전체성, 다시 말해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나의 일, 일터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일들, 직장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계들을 다 포함시킵니다. 전체적인 영성의 접근방식에서 볼 때, 영성을 아주 간단히, 삶 그 자체와의 공존(coexistence with life itself)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성이라고 할 때,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다양한 그리스도교 영성들이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또 그 기도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영성이라고 할 때 기도, 또는 기도와 관계되는 어떤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단지 기도나 신앙, 또는 거룩함에 이르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흔히 영성은 우리의 영혼 사정에 관한 어떤 것이기 때문에 일상 삶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엿새는 세상 안에서 열심히 살고 주일 하루 영혼 사정을 돌보는 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영성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지요. 영성은 영, 즉 성령과 관계되어 있는데 성령께서 일주일에 엿새는 우리 안에 계시지 않고 떠나 계시다가 하루 만 와서 머물다 가십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성령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 일상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는 영성이 바로 우리의 일상 삶, 우리의 정신적, 사회적, 실제적 삶의 선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성이란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맺는 여러 가지 일들과는 동떨어진 영혼 사정만을, 또는 기도나 신앙생활만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이것은 오해를 넘어서서 무지의 소산입니다. 영성이라는 말의 그 중심에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계시지만 또한 우리의 영, 즉 영혼도 관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그 모든 일 안에서 바로 우리의 영혼도 함께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바라본다고 할 때, 바로 우리의 영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이 하나로서 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삶 안에서의 선택은 늘 영적인 것이며 우리의 영성은 그 자체로 세상 안에서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닌 영성에 따라 그 영성이 우리 일상 삶의 모든 영역 안에서 모든 부분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영성에 따라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며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현대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물질 만능주의로 치닫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고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보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책상 앞 컴퓨터 앞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앉아있다는 것이 물질로는 채울 수 없는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존재라는 증거이지요.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 아니 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한 인간인 까닭에 영적인 갈증,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무한에 대한 동경, 절대자에 대한 추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눈을 뜨고 세상을 그리고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영성은 이것을 바라보게 하는 길입니다. 이제 영성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과 연관된다는 것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영성은 단지 기도나 전례, 단체 활동(레지오) 등 종교 활동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 성장, 인간 개발의 모든 측면, 심리학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모든 측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의 양식으로서 전체적인 영성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제한된 시간과 능력과 자원 안에서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전체적인 인간으로서 이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통합시킬 수 있는가? 보다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어떻게 참으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다움을 신앙 삶 안에 통합시킬 수 있는가? 전체적인 영성, 다시 말해 영성 생활을 전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두 가지의 진리를 전제로 합니다. 


첫째는 완덕, 거룩함을 추구한다는 것이 결코 건강한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 영성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결코 인간 조건에서 제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현장 안에서 고뇌와 갈등을 겪으면서 때로는 투쟁을 하면서 성장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


성 이레네오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으로서 온전히(fully)사는 것이고, 우리의 성소, 인간으로서의 성소는 바로 끊임없는 인간 성숙으로의 투신이라고. 인간 생명이 바로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인데, 그분은 단지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창조사업의 협조자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창조의 의미.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삶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협력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우리는 거기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장을 체험하고자 하는 내적 갈망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겠다는 거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 인간으로서 성장되어 가는 과정 안에서 하느님은 부르심으로서, 사랑으로서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전체적인 영성은 인간으로서의 계속적인(ongoing)성장을 신앙인으로서의 성숙에 본질로서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성 생활이 건전한 인간 성장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현자의 말을 음미하면서 이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만약 그대가 19살 난 몸 위에, 40살 먹은 머리를 붙여 놓으려 한다면 그것은 괴물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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