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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종칠금(七縱七擒) ◆ / serein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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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종칠금(七縱七擒) ◆ 

serein82


"知彼知己,百戰百勝,不敗!" "必死卽生,必生卽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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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記作成者의글=共有出處告知]


칠종칠금(七縱七擒)


[字解] 


七(일곱 칠) 

縱(놓을 종) 

七(일곱 칠) 

擒(사로잡을 금) 


[意義]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다룸을 비유하거나 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出典] 삼국지(三國志). 


[解義]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음대로 잡았다 놓아주었다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칠금(七擒)´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인 유비(劉備:Link #1)는 제갈 량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위(魏)나라를 공략하여 생전의 유비의 뜻을 받들어야 했던 제갈 량은 먼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 


유선이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제갈 량은 적진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책을 썼다. 

과연 반란군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서로 살육을 일삼았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등장한 반란군이 바로 맹획이라는 장수였다. 맹획이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노강 깊숙이 들어가 그를 생포했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생포된 맹획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맹획을 생포한 제갈량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촉한의 무장인 마속(馬謖)도 


´용병의 도리는 최상이 민심을 공략하는 것으로, 군사전은 하책일 뿐 심리전을 펴 적의 마음을 정복하라´고 했다. 

제갈 량은 오랑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북벌(北伐)도 한결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여 맹획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맹획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하여 맹획을 다시 사로잡았지만 또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마침내 맹획은 제갈량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부하 되기를 자청했다. 

여기서 ´칠종칠금´이란 말이 나왔으며, 오늘날 이 말은 ´상대편을 마음대로 요리한다´는 뜻으로 비유되어 사용된다. 


[제갈 량 諸葛亮(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전략가. 

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 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陝西省 톱縣)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마속 馬謖(190~228)]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武將). 

자(字) 유상(幼常). 양양의성(襄陽宜城:湖北) 출생. 5형제가 모두 명성을 떨쳤다. 

유비(劉備)를 따라 촉(蜀)에 들어가서는 제갈 량(諸葛亮)에게 중용(重用)되었다. 

그러나 유비는 임종 때 ‘마속은 말이 사실보다 지나치니 중용하지 말라’고 제갈 량에게 경고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제갈 량은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장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속을 선봉의 총대장으로 임명했으며, 그 결과는 패전이었다. 

제갈 량은 군율(軍律)대로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베었으며(읍참마속의 고사:Link #2), 유족에 대해서는 종전처럼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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