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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가나다順)/기독교 바로알기

성서의 형성사




성서의 형성사







1.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은 여러부분과 여러모양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성서에 수록되어 있다.

첫째, 이사야가 성전에서 들은 음성, 사무엘이 들은 음성,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들으신 음성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시려는 뜻을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그냥 사람에게 전달 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여러가지 형태로 구체화 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을 이른바 하나님의 역사화(歷史化) 작업이라 한다. 성서에서 주신 말씀은 일체 역사화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실 때 사용하신 방편도 여러가지 나타나는데 우선은 역사속에 사건들을 일으키셔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고 간섭하신 사건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고 배우게 하시며 다음에 예언자들과 시인과 지혜자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를 해석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사람의 말로 전달하게 하셨다.

넷째, 여러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동시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문서화하게 될 때 더욱더 다양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다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큰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역사로서, 시는 시로서, 비유는 비유로서, 격언은 격언으로서, 소설은 소설로서, 희곡은 희곡으로서, 신화는 신화로서 각각 분류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적절한 해석법에 따라 해석할 때에, 그 계시의 참 뜻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구약성서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부분도 사람의 글이 아닌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저자들이 고유한 환경 속에서 기록한 책들이 모여서 성서가 되었기 때문에 성서는 역사적인 검토와 문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1. 구약성서의 세 구분

우리들은 지금 39권으로 된 구약 경전을 구약성서 라든가 구약전서라는 말로 흔히 부르고 있다. 그러나 원어 성서에는 그런 이름 대신 오늘날까지도 토라(율법), 느비임(예언서), 우케투빔(그리고 聖문서) (Tanak = Torah, Nevi’ m,  Keth v m) 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이 세가지 명칭의 순서는 이런 문서들이 성경으로 채택된 역사적 순서를 말해주기도 한다.

2-2. 율법서의 형성 Torah

5경은 유대인의 전통적 견해처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 쓴 책이 아니라 하나 이상의 문서 편집으로 형성된 합성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지적해 낸다는 것은 오경(五經) 편집자를 과소평가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조금도 아니다. 도리어 오경 편집자들이 취급하는 자료나 문서에 대해서 지나치게 꼼꼼하다고 할 만큼 정직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5경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아무도 그 정답을 줄 사람은 없다.  5경과 아울러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언자들의 설교가 언제 문서화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학문적 추구를 통하여 얻을 수 있었던 최선의 설명은 ‘문서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족장시대와 그리고 가나안 정복 이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법률을 모은 것들이 구두(口頭)에 의해 대대(代代)로 전승되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정된 정치 체제를 이루어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혼란기를 얼마동안 가졌다. 이런 난국에 관한 이야기들 곧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등의 정벌담(征伐談)들이 민중 속에 계속 인기를 모으며 이 입 저 입으로 전해졌다. 그 후 사무엘과 사울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 족속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고 자기 방위와 자립의 실력이 넉넉해졌을 무렵에는 상당한 부피의 법률과 이야기들과 찬양시들이 구전(구전)으로 혹 문서(文書)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다윗 시대에 우선 여러 뭉치로 수집된 성문 자료들이 입수되었던 것 같다. 또 이 시대에 왕궁의 기록들과 공식 연감들이 수록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문서 활동이 이스라엘 민족 생활 속에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먼저 남쪽 나라 유대 왕국에서 솔로몬 왕의 사망 후에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문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 문서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여호와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따서 ‘J문서’라고 부른다. 그 다음으로 북쪽 나라 이스라엘에서 또 하나의 문서가 생겼다고 본다. 이 문서를 ‘E문서’라고 한다. 이것은 J 문서보다 1세기 이상 늦게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주전 621년에 유대 나라 요시야 왕의 대 혁명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성전에서 발견된 책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학자들은 이 책을 현재의 신명기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문서를 ‘D문서’라고 한다. 이렇게 D문서가 발견됐을 때는 이미 J, E라고 하는 서사적 역사 문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D문서를 모세가 준 율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J, E 와 D를 함께 섞고, 모세의 죽음 이전까지의 이야기 속에 삽입하였다. 이렇게 하여 5경은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갔다. 그 다음 문서가 거룩에 대한 규칙과 원리를 규정한 ‘H문서’ 이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에 의해 작성되었던 문서가 ‘P문서’(제사장 문서)이다. P문서의 특색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종교적 제도나 절기들의 기원을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5개의 각각 독립된 문서들이 수집, 편집, 삭제, 첨가의 과정을 거쳐 그 후 100년동안 하나님의 인도 아래 5경이라는 오늘날의 문서형태와 같이 되었다.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주전 400년 경에 제일 먼저 성서로서 수락되었다.

2-3. 예언서의 형성 Nevi’ m

예언서와 예언자가 출현하게 된 동기는 가나안 종교(가나안 주의 혹은 바알 사상)가 야훼 종교를 위협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예언서 기자들의 증언과 역사 해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먼저 예언서 기자들은 사건을 분석할 때,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하고 설명해 주느냐 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사건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발견하고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었고, 그 필요에 따라 예언자적 역사 편찬을 하였다. 예언서 형성 과정의 골격은 다음과 같다. (구전형태 → 서전형태 → 수집 → 편집)  

정확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 전설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성서의 여러 문서들이 모이고 수집되어 정경화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힌트를 얻어 예언서가 적어도 주전 165년 경에는 성서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분되는데,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네권의 책을 말하고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 소선지서를 말한다. 

2-4. 성문서의 형성  Keth v m

성문서는 성질이 다른 여러가지 책들을 모아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율법서나 예언서처럼 동질적 통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여기에 속한 여러 문서들은 개별적으로 대중의 수납에 의해서 성서로 간주된 것이지,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서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성서라기보다는 종교 문학으로 서 간주되어 내려왔었다. 그렇다면, 성문서 (cf, 룻기, 애가, 전도서, 아가,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에 속하는 11권의 책은 어떻게 해서 구약성서의 일부분이 되었을까? 

그것은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그것들의 절대적 가치가 인정되면서, 동시에 그것이 익명(匿名)의 책들이어서, 영감이 작용하던 옛 시대 인물들의 작품으로 취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성서로 채택되기 까지는 역시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주후 90년경 얌니아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권위있는 회의가 열렸고, 그 얌니나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종적으로 낙착(落着)되어 그 수가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의 그것과 꼭 같은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구약성서는 근 천년의 긴 역사를 거쳐서 한 개의 거룩한 총서로, 그리고 정경으로 채택되고 낙착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 해 두어야 할 점은, 근본적으로 이런 경전 채택의 결정이 어떤 회의나 몇몇 교회의 어떤 위원회의 결정이나 명령에 의해서 채택 된것이 아니고, 그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역사와 경험이 명백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증명해 주었기 때문에 성서로 채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단지 권위있는 어떤 회의가 반복하고 확인하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것이다.



3. 신약성서의 형성


신약성서도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문서들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인공캡슐에 넣어져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기문서가 아니라(非역사적 문서) 역사 위에 씌여진 즉, 다시 말하면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해석되고 기록된 책들이 오래고 또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집성되어 이루어진 문서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될 상식이있다. 초대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여 나갔다. 그러면 어째서 신약성서가 기록되었으며 언제부터 기독교 경전이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이 글을 살펴보자.

3-1. 제 1 세기 교회는 신약 정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생활 형편 :

3-1-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그들의 감격과 신뢰감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또 다른 성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     

3-1-2.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目睹)하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신자들도 많았고, 적어도 그 목격자들의 생생한 보고와 증언을 들으며 거기에 도취하고 감격하여 살았으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에 대한 어떤 기록의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3-1-3. 신약성서의 문서화 이전에 ‘복음 사건’에 대한 해석 시대가 있었다. 이런 해석이 문서화되어 신약성서가 형성되기에 앞서서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구두 증언과 사색의 시기가 얼마동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3-1-4. 사도 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 정경이 곧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영구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화 작업은 불필요 하다고 여겼다.

3-1-5.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은 후 초대 교회는 실상 구약성서나 어떤 문헌에 의존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3-1-6. 인쇄술이 발명되지 못한 그 시대에 있어서는 특수한 사정 이외에는 글을 써서 남겨 둔다는 것이 극히 어렵고 드문 일이었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와 필요성이 없이는 신약 문헌이 생겨날 수 없었다.

3-2. 구두 전승의 신빙성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 사화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사”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 :

3-2-1. 옛날에는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싶으면 부득불(不得不) 머리 속에 기억해 두는 길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히브리인들 특히 랍비들은 성경을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고대에는 한 번 들은 것을 잊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우리들보다 훨씬 적었다고 볼 수 있다.

3-2-2.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은 아주 초기부터 어떤 개인의 기억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공동적 기억에 근거하여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어 거의 변함없이 구전 시대를 통과했다.

3-3. 구전 시대의 종결과 신약 문서의 형성 개시

3-3-1. 사도들과 예수 사건의 목격자들이 영구히 살아 있을 도리는 없었다. 주후 70년 경에는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죽어버렸고 따라서 그들의 생생한 증언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사도들의 산 음성이 사라지자 그것을 보충, 대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문서화된 복음서들이었다.

3-3-2. 기록된 문서의 가치가 문화적 세계로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매우 큰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3-3-3. 기독교가 요원의 불길처럼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어 갈 때, 조급한 심정으로 땅 끝까지 가서 증거하려는 선교사와 전도자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에 제일 좋은 방법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글로 적어서 남겨두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 내용의 문서화는 선교 과정에 있어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3-3-4. 그리스도의 급박한 재림을 기다리다가 수십 년이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지금까지 급박한 종말신앙 때문에 소홀히 하던 장래의 교회 문제에도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교회를 위하여 문서화된 말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다.

3-3-5. 초대 교회는 거짓 복음들과 왜곡된 신학과 비윤리적 윤리를 판단하고 가려내기 위해서 표준적이고도 공적인 문서 복음이 요구되었다.

3-3-6. 교회는 호교적인 목적으로도 문서가 필요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였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필요로 하였다. 둘째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우선 로마 정부로 부터 예수가 누구인지를 확신케 하기 위해서 문서화 할 필요가 있었다. 세째로 전도자들이 전혀 사상이 다르고 이해의 영역(사고의 출발점 cf. 일원론과 이원론)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상 전달의 방법으로서 문서를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했다.

3-3-7.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하고 표준을 찾기 위해서 문서화된 복음들이 요구되었다.

3-3-8. 일단 교회가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발전되었을 때에는 그 사회의 습관을 따라 예수의 고귀한 생애와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기록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과 생애가 무엇보다도 귀중하며 잃어서는 안 될 것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문서화 될 수밖에 없었다.

3-3-9.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낡은 계약의 책, 즉 구약 책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새 계약의 책도  필요로 하였다. 그러므로 새 계약 시대에 신약성서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3-10.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신도들의 예언활동이나 방언활동들을 판단하고 탈선적 행동을 규제하려는 목적으로 불안정한 구두 발언보다는 좀 더 신빙할 만하고 표준된 聖문화된 복음서가 요구되었다.

3-3-11. 신약 문헌의 대부분은 어떤 개체 교회 혹은 교회의 작은 단체를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교회들은 이 편지들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생활의 여러가지 위기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참 좋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침내는 그 문헌들이 수집되고 또는 널리 반포되어 결국 정경(Canon)에 포함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3-4. 복음의 형식
구전 시대에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이 단편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근자의 신약학자들은 이렇게 고정된 이야기들과 교훈 자료들을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하여 취급한다.

3-4-1. 첫째 형식을 범례(凡例) 혹은 경구(警句), 또는 선언적 이야기라고 한다. 이 형식은 예수의 몇가지 중요한 격언적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토막 교훈들이 복음서에 산재해 있다고 본다.

3-4-2. 둘째 형식은 설화 또는 이야기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예수가 하신 말씀 보다도 그가 행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있는 것들이다.

3-4-3. 세째는 교설(敎說)이라는 형식이다. 이것들은 어떤 전후 관계가 없이 고립적으로 보존된 예수의 말씀들이다. 그리고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말씀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다.

3-4-4. 다음은 성전(聖傳)이라는 형식이다. 이것은 어떤 성인이나 성소와 관련된 비상한 사건들에 대해서 교훈 할 목적으로 기록된 이야기들을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비상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비상한 인물이 언제나 거기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3-4-5. 다섯 째는 신화(神話)라는 형식이다. 
이와 같이 학자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을 여러 가지의 문학형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으로 초대 교회에 유포되고 고정되어 있던 자료들을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편집되었다고 보고있다.

3-5. 신약성서의 실제적 출현
구전 시대가 지나고 문서 운동이 시작되자, 기독교 문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 27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약성서 이외에도 다른 많은 복음서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문서들 중에서 어떤 것은 성서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버림을 받았을까? 어째서 어떤 문서는 아주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또 어떤 것은 사사롭게나마 읽을 수 있도록 용납되거나 추천을 받았을까? 그리고 어째서 어떤 문서들은 마침내 완전히 신약 성서에 끼어 들 수 있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다는 오직 한가지 이유때문이다. 일단 어떤 책이 공중 예배에서 낭독되기 시작하면 그 책이 정경이 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예배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읽지 않아야 할는지 결정짓는 일은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교사들과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령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과 성령 감동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표준으로 하고 책들을 판단하였을까? 

그 표준은 그 책이 사도적 권위를 가졌는가 아닌가에 두었다. 다시 말해서 그 책이 어떤 사도의 저술이든지간에 적어도 사도들과 직접 접촉하던 사람들이 쓴 것이라야 했다.

3-6. 사도적 권위의 정당성  
초대 교회가 사도적 저작권을 정경 선정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몇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3-6-1. 히브리 사상에 있어서 보냄을 받은 자는 어떤 의미에서 보낸 자와 동등하다고 생각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도는 예수의 최고 대표자들이요,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최고의 기관인 바 교회에서 사도들의 말은 예수의 말씀처럼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권위가 부여 되었다.

3-6-2. 초대 기독교 내에 왜곡된 복음과 이단들이 잠입해 들어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많이 변질되고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들이 참이고 거짓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도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글이 진성정 문제의 시금석이 되었고 그들의 글은 자연스럽게 권위를 가질수 밖에 없었다.            

3-7. 바울 서신의 집성(集成)
이제 신약 성서가 집성되는 실제적 과정을 상세하게 검토 해 보자.

바울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어떤 지방 교회의 잠정적 형편을 다루어 취급하면서 편지를 썼다. 바울의 편지들은 어떤 서재나 도서관에서 조용히 앉아 연구하여 작성한 신학 논문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특정한 시간에 어떤 특정 교회가 당면한 급박한 정황을 취급하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들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바울은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의 편지들이 수집되고 모든 교회의 공동적 소유가 되고 결국에는 정경화 되었을까? 바울의 편지들이 한 책으로 모아지고 온 교회의 소유물이 되어 마침내 성서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일까? 

그 가능성에 대한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자연스럽게 성장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후 80~90년 사이에 사도행전이 기록, 발표되는 일로 인해서 그 동안 거의 망각 되었던 바울이 초대 교회에 있어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각광을 받게되자 그가 쓴것은 남김없이 되찾아 연구하고 수집하고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3-8. 바울 서신 집성의 장소와 책임자
바울 서신들이 집성되어 발간된 장소는 주후 90년경에 에베소에서 된 일이라는 보는 견해가 학자들 간의 정설 정설(定說)이다. 그렇다면 이 뜻 있는 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얻을만한 역사적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두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는 ‘빌레몬서’를 매개로 해서 추리해 본 굿스피이드와 존 녹스의 가설이다. 그들은 빌레몬의 종 이었던 오네시모와 에베소 교회 감독이었던 오네시모를 동일인으로 본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나왔을 때 객지에서 바울을 만나 바울에게서 아주 친근하고 많은 도움을 받게된다. 그 오네시모가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고나서 자기가 사랑하고 또 자기를 사랑해주었던 상전 곧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출판하는 일에 착수했다는 가설이다.

둘째는 미국 침례교 학자 다나의 가설인데 바울의 사망이 그의 서신 수집의 계기가 됬을 것이고, 바울의 사망이 동기가 되어 다시 바울의 글을 읽게되고, 그것을 수집하기에 이르렀다는 가설이다.

3-9. 복음서의 형성과 집성
복음은 우선 구두로 전달되었고, 전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직접 선포되었다. 그렇다면 복음서들이 오늘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 어떤 형성과정을 거쳤을까? 아마도 복음서가 형성되기 전까지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학자들이 이름 붙인 ‘Q자료’ 같은 것이 있어서 마태나 누가가 자기들의 복음서를 쓸 때 자료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Q라는 것은 본래 자료라는 뜻을 가진 독일말 Quelle를 줄인 것으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Q외에 ‘증빙서’라고해서,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모아 놓은 성구집이 있다. 이와 같은 자료 문서들 외에도 누가, 마태가 개별적으로 특별히 참고했던 자료집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복음서가 기록된 이 후에도 많은 복음서들이 교계에 나돌았지만 4 복음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복음서 자체가 지닌 그 진리성과 권위가 독자들을 압도하고 강박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락할 수 밖에 없이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교회가 사도적 증언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에 4 복음서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문서로서의 위치를 견지하여 온 것이다.

3-10. 그 밖의 책의 수집 
사도행전은 4복음이 따로 수집됨에 따라 외롭게 독립되었다가, 마침내 예수의 생애와 서신이 기록되던 사이에 자연적으로 연결을 지어주는 책으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공동 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것은 상당히 후대 즉, 2세기 말 이 후의 일이었다. 계시록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고 인정되었었다. 그러나 2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묵시록(黙示錄)들이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고 요한 계시록만이 교회에 광범위한 수락을 받았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3-11. 성서로서의 인정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로 책들이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제 멋대로 판단하거나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사도적 저작인 동시에,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증적(自證的)인 품질이 독자에게 신언(神言)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좀 더 명확하게 어느 책은 성경이고 어느 책은 성경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자인 말시온의 운동때문이었다. 말시온 일당은 다른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담아내는 포장품의 역할로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 말시온은 주후 85년, 부유한 집안의 한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교회 지도자들과 교리싸움을 하고 고향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주후 140년경 로마에 사는 영지주의자 Kerdon을 만나면서 유대교의 창조설화 해석을 배우게 되었다. 말시온은 이러한 해석을 구약에 적용시키면서 구약과 신약의 神을 별개의 神으로 보고 신약 가운데서도 유대교 색채를 삭제시켜 “말시온 성서”를 만들게 된다.

말시온은 제 멋대로 자기의 주장을 맞추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왜곡 해석 했으며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르고 붙였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개인이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화 작업을 착수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라는 신약성서 목록이다. 이 목록이야말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주후 17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서 그 당시 교회가 성서로서 받아들인 책들이다. 그 목록에 나타난 책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 고린도 전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전후, 로마, 빌레몬, 디도, 디모데 전후, 유다, 요한1.2, 요한 계시록, 베드로 계시록이다.

2세기 중엽에 들어서 제도화 된 교회 시대가 시작 되었다. 교회는 이미 예언의 영(靈)이 역사화하는 곳이 못되고, 사람들이 교회로 마구 밀려들어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없어지고 말았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이방 사상, 문화, 철학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윤리는 이미 그 숭고성을 잃고 말았다. 이런 때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몬타누스는 스스로 자기를 약속된 보혜사라고 하며, 교회를 위하여 새 환상과 새 메시지를 가지고 왔노라고 주장하였다. 몬타누스는 이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니 성서는 수도없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마침내 성서를 마감하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2세기 말경에 교회는 신약 정경을 한정하고 원칙적으로 성서 산출이 이미 끝났다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서 채택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은 각 책의 사도적 저작권 문제 때문이었다. 그 후 3~4세기 초에 걸쳐서 문제 된 책들을 체질하여 가려내는 과정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서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교부인데 그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을 실질적으로 모두 정경 목록에 넣었고, 그 이후에 정경 내용의 변화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정경 형성의 마지막 단계를 살펴보자. 주후 367년, 애굽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꼭똑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방에서는 어거스틴도 이 정경 목록을 지지하였고,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동방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교회의 정경과 동일한 정경목록을 가지는데 도달하였는데 수리아 교회는 22권만을 채택하였다. (cf. 베드로 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 제외)  지금도 동방 수리아 교회는 여전히 22권의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