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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가나다順)/기독교 바로알기

“한국 초기 선교사들, 출판·인쇄 분야의 개척자”




한  국

초기 선교사들,

출판·인쇄 분야의

 개 척 자




류  현  국   교수,

12년간 40개국서 연구해

「한글 활자의 탄생」 출간


▲ 지난 10월 초 방한한

저자 류현국 박사(오른쪽)와 일본 활자사 최고 권위자인

고미야마 히로시 사토타이포그래피연구소장.

ⓒ이대웅 기자


“한국 활자 인쇄의 근대화는 많은 부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신식 한글 활자를 개발해 서양의 인쇄기술로 한글 성경을 출판·보급하고,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읽히게 한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 출판 인쇄 활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49쪽).”


<한글 활자의 탄생 1820-1945(홍시)>은 납활자 이전 금속활자나 목활자, 도활자 등이 한국 서지학계에서 깊이 있게 연구돼 온 것과 달리, 이렇다 할 연구 업적이 없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등 근대 시기 한글 납활자의 생성과 발달 과정을 복원한 대작이다. 저자인 류현국 교수(쓰쿠바기술대 종합디자인과)는 이를 위해 최근 12년간(2002-2014) 한글 활자의 원형과 계보를 찾아 40여 개국을 직접 방문해 발굴한 자료들로 ‘역사의 공백’을 메웠다.


‘한글’이 아닌 ‘한글 활자’의 역사라는 점이 이채로운데, 이에 대해 “서체는 그 나라의 문화와 기술, 정신을 내포한다. 서체 디자인은 활자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정신적 기둥을 구축한다”는 말로 답한다. 그리고 12년간 한글 활자사 연구의 결론은 이것이다. “한글 활자의 발달사는 기독교의 성서 번역 출판의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이 책은 최근 한국 역사학자들이 근대사에 공헌한 기독교의 역할을 ‘서양의 영향’이라는 이유로 왜곡·축소시키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결과물이라 특히 주목받고 있다. <한글 활자의 탄생>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글 활자를 개발하여 성경을 인쇄하고 다국어 사전이나 한글 교재를 만드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다음은 저자인 류현국 교수와의 일문일답.


- 구한말과 일제 시대 활자사를 연구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계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활자 속에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대에 대한 연구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활자를 만드는 기술은 그 나라 문화와 기술의 척도가 됩니다. 문화의 기본은 책을 만들고 보급하는 데 있지 않습니까? 국권과 경제권을 강제로 약탈 당하는 불평등조약인,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과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의 의정서도 결국 활자로 만들어져 인쇄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기록은 활자로 이뤄지고, 활자가 만들어지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 선교사들은 왜 복음을 전하면서 ‘한글’에 주목했을까요.


“활자에는 그 나라의 정신문화와 기술이 농축돼 있는데, 연구를 통해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부분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사람들이 아예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한글 읽기 교육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한글 교육의 구심점 역할을 선교사들이 최초로 하게 된 것이지요.


세계사 전체로 봐도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그 나라 언어로 된 성경을 갖고 복음을 전하러 들어간 것은 우리 뿐일 것입니다. 성경도 순 한글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번역에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출판한 <한불자전(1880)>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82년 영국인 존 로스(John Ross·1837-1905)를 통해 만주에서 한글 낱권성경 11권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조선인 '권서인(colporteur)'들은 만주에서 성경 인쇄를 위해 활자를 직접 만들었고, 조선은 쇄국정책을 내세웠기에 그들은 복음에 생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1885년 미국인 언더우드 선교사도 영문 타자기와 이수정의 한글성경 번역본을 들고 입국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주로 미국장로교의 도움을 받아 한글 성경이 간행됩니다. 이후 만주 계통과 미국 계통이 연합, 1887년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 2천 부를 요코하마에서 출판했습니다. ‘언해’란 한자의 문장를 한글로 대역했다는 말로, ‘순수 한글’ 성경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것이 최초의 국내 번역판 순한글 복음서였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교회사 연구에서 조금씩 밝혀졌지만, 활자 관련 연구는 아무래도 소상하게 이뤄지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 (왼쪽부터 순서대로) 

①미국성서공회 지원으로 출간된 국한문 혼용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해(1885)> 표지

②순 한글로 번역됐으며 본문에 한글 4호 활자가 사용된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1887)> 표지 

③본문. ⓒ홍시 제공


- 존 로스 선교사가 만든 활자는 어땠는지요.


“존 로스 선교사는 처음에는 한글 학습서 <조선어 초보(1877)> 의 간행을 위해, 신식 4호  분합활자와 3종류의 분합 목활자(자음자활자와 모음자활자의 조합방식)를 급하게 제작해서, 활자의 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이후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BSS)의 지원으로 1880년 일본의 도쿄 츠키치활판제조소에서 이응찬이 그린 원도(原圖·활자 설계도)와 서상륜의 종자(種字) 조각에 의해 양질의 ‘신식 한글 3호 활자’가  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1882년 중국 심양에 최초 개신교 활판소인 ‘문광서원’을 세워 한글 성경 인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신앙고백서 혹은 교리서 <예수성교문답(耶蘇聖敎問答)>과 <예수성교요령(耶蘇聖敎要領)> 4쪽이 한글 소책자 시험본(Tentative edition)으로 1881년 10월 인쇄된다. 시험본 인쇄에 성공한 로스 선교사는 1882년 3월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5월 <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 1883년 1-2월 <예수성교성서 요한복음>을 3천 부씩 인쇄했고, 10월 <예수성교성서 누가복음 제자행적> 인쇄 때는 ‘예수’, ‘하나님’ 등의 앞에 한 글자 띄어쓰기(대두법)를 실시한다.


책에서 류 교수는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 두 소책자에 사용된 단어와 문장, 문법과 번역 등은 한국어학 역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며 “뿐만 아니라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한글 개신교 문서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 순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신약성경 <예수성교전서(1887)> 표지. ⓒ홍시 제공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제작 주체와 관련해 주장이 엇갈리는 ‘한글 해서체 4호 활자(1884)’에 대해서도, 류 교수는 개신교와 관련된 새로운 입장을 제시한다. 한국에서는 이 서체를 ‘한성체’로 부르면서 신문 <한성주보(1886)> 창간을 위해 제작됐다고 주장하고, 일본에서는 이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이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일본인이 조선에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류 교수는 수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후, 조선어 교사로 있다 일본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개신교 신자 이수정과 관련, 일본에 있던 미국 선교사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목사의 주도로 제작된 활자라고 설명한다. 이수정은 루미스의 제의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1883년 <마가복음> 번역을 끝낸 후 미국성서공회(ABS)에서 간행했다. 루미스 선교사는 1883년 11월 ABS 뉴욕본부에 활자 개발과 관련된 지원금 요청 등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


루미스 선교사는 이수정에게 신약 4복음서 간행을 위한 한글 번역을 부탁했고, 일본에서 발행된 최초의 국한문 번역본 낱권 성경인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해>를 1884년 12월 완성시켜 1885년 초 요코하마에서 이를 간행했다. 루미 선교사는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언제든지 조판·인쇄할 수 있도록 활자 세트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4호 활자는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1885년 전달됐고, <한성주보> 발행을 비롯해 최초의 순 한글 민간지 <독립신문(1897)>과 최초의 아동잡지 <소년(1897)> 등에 사용됐을 뿐 아니라 국내 각 인쇄소와 출판사에도 많이 보급됐다. 또 아펜젤러가 만든 최초의 기독교 신문 <조선그리스도인회보(1897-1905)>, 언더우드가 만든 최초의 장로교 주간신문 <그리스도신문(1897-1907)> 발행에도 사용됐다. 류 교수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4호 활자는 당시 완성도가 가장 높은 본문(명조)체였다”고 했다.


- 로스 선교사가 만든 활자와 일본에서 만들어진 활자는 어떻게 다른가요.


“로스 선교사는 보급을 위해 직역체 대신 대화체와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성서 내용 자체에 충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던 루미스의 제의를 받은 이수정은 한자와 한글을 병행했지요.


하지만 한국 선교에 나선 언더우드 선교사는 표준어를 쓰면서 두 가지의 장점을 합치고 싶었습니다. 이 점에서 ABS와 연결된 루미스 선교사와 방향이 달랐고, 언더우드는 대량 인쇄가 가능한 일본에 직접 찾아가 친구와 선배들의 도움으로 1887년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를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 최초의 복음서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1882)>

본문에는 14행 28자가 사용됐다. ⓒ홍시 제공


- 에필로그에 ‘마지막으로 오랫동안의 타국 생활에서도 늘 삶에 용기와 숭고 그리고 겸손을 갖게 해 주시고, 사랑과 배려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1월 본서의 교정 등으로 철야 작업 후 심장마비로 쓰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3년 전부터 한글 성경의 분석을 시작해 거의 끝났을 때였습니다. 성경 관련 내용들의 분량이 방대하고, 그동안 무리한 일정으로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피곤한 몸으로 집을 나오다가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면서 쓰러졌는데, 급성이라 바로 수술하지 않고 1주일간 먼저 약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한 군데만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수술을 시작했는데, 심장의 뒤쪽 부분에도 문제가 발견됐습니다.


의사들 말씀이 대부분 ‘이 정도면 터져서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오게 되고, 수술 도중 발견되는 경우는 희귀하다’고 합니다. 그때 기도의 힘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수술 후 가슴이 매우 뜨거웠고, 1주일간 그 ‘뜨거움’이 계속됐습니다. 의사는 수술 후 그런 증세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빛’을 봤다고 생각했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도 ‘성령의 은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책이 탄생됐기 때문에 그 말을 넣었습니다. 성경 관련 부분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하나님 말씀에 관한 것인데 잘못 쓰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잘 다니진 않았지만, 미션스쿨을 나왔고 신학대에서 교양강좌도 2년간 들었습니다. 목사가 될까 하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어서인지 친구들 중에 목회자가 많습니다(웃음). 저를 위해 목사님들이 기도를 많이 해 주셨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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