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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국을 빛낸 사람들

‘조선의 바울’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창식(1857~1929)


       


       




理致順理事理~思理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조선의 바울’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 창식(1857~1929)

황 명길 교수

   

한국에서 첫 목사의 탄생은 1901년 5월 감리교에서 나왔다. 


머슴 출신으로 ‘조선의 바울’이라고 불린 김 창식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1857년 황해도 순안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전국을 이곳 저곳을 목적 없이 떠돌아 다녔고 돈이 떨어지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머슴살이와 마부 일을 하면서 팔도를 유랑하였다. 


그의 이런 방랑생활은 시골 농촌에 태어나 농사꾼의 아들로 성장하면서 느낀 소외감과 무익한 삶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8년 동안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조선 8도를 여행했고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러나 현실은 여유 있게 구경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막일이라도 해야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하층민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우연히 결혼도 했다. 


가 결혼할 즈음에 서울 장안에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문이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의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었다. ‘영아소동’(Baby Riot)이라 불리는 이 소문은 1888년 봄부터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일부 반미(反美), 반개화(反開化)를 주장하는 수구파 세력들이 조작해낸 것이었다. 


그 결과 선교사의 집이나 학교들이 습격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은 조선정부가 나서서 변명했으며 미국 • 프랑스 • 러시아 군대가 상륙하여 서울 시내를 행진함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김 창식은 미지의 세계에서 온 서양 선교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이들의 실체가 아이를 잡아먹고, 늙은이는 잡아다 말에게 먹이고 젊은이는 솥에 쩌서 먹는다는 소문대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던 그에게 이 무영(李戀榮)이란 친구가 서양 선교사의 집에 사환으로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왔다. 


그래서 기회로 생각하고 들어간 선교사의 집이 감리교 선교사 울링거(F. Ohlinger)의 집이었다. 울링거 선교사는 당시 배재학당에서 삼문출판사를 

운영하던 선교사였다. 


김 창식이 울링거 선교사의 집에서 하는 일은 문지기였다. 그는 문지기로 있으면서 언제 선교사가 아이들을 잡아먹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선교사들의 인격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다음은 그의 고백이다.


‘내가 맨 처음으로 일을 하던 집은 울링거 목사의 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 주인 내외의 생활을 매우 주의하여 살폈으나 아무리 살필지라도 조금도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몇 해 동안 그 집에서 일하는 가운데 그 집주인 내외가 다 가히 본받을 만한 사람인 줄 깨닫고 그들에게 감화를 받아 예수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렇게 김창식은 5년 동안 선교사를 탐색한 결과 선교사의 허물은 찾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예수교인이 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된 것이다.


이후 김 창식은 올링거의 귀환으로 인해 의료선교사 홀(W. J. Hall)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했는데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발생되면서 관아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사건은 해결되었다. 


때 풀려 나온 김 창식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인 전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심으로 그는 1896년 평양에서 시작된 신학회에 참석하여 목회자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그에게 주어진 사역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순행사역이었는데 이 사역이야말로 타고난 행객 김 창식에게는 적격이었다. 


이후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1901년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24년 은퇴하기까지 순행목회에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한곳에 머물러 찾아오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지 않고, 끊임없이 교인들과 불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사역을 했다. 


그는 평생 10번의 이사, 48개 교회 개척, 수없이 많은 설교, 그리고 감리교회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사역을 했다.


한편 김 창식은 우리에게 ‘전도목회론’으로도 유명한 목회자이다. 그는 전도를 3단계로 정리하였다. 길 읽은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제1단계, 그 길을 가다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찾아가 스스로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제2단계, 그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흔들리지 않은 신앙의 길을 가도록 권면하는 마지막 제3단계로 설명하였다.


살펴본 것처럼 김 창식은 스물한 살에 집을 나와 전국을 유랑했던 방랑자였다. 그는 선교사의 정제를 파헤치기 위해 선교사의 집에 잠입했으나 그들의 인격에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이후 그는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는 순행사역을 했다. 무엇보다도 당대 그에게 주어진 ‘조선의 바울’ 이라는 별명은 오늘 전도를 꺼려하는 현대 목회자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경고를 하고 있다. 그는 1929년 해주 구세요양원에서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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