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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찬란한 빛/한국을 빛낸 사람들

하얀 목련이 지자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박정희 대통령)



하얀 목련이 지자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박정희 대통령)


  




비명에 간 영부인(領夫人)을 그리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하얀 목련이 지자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

 

 1974년 8월 15일 오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운명했다.

재일 동포 문세광(文世光)이 쏜 총탄에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1974년 8월 19일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축제일을 슬픔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도록 한 데 대하여

진심으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여러 분들이 보내주신

정중한 조의에 보답하는 길은

이 땅에서 폭력과 빈곤을 몰아내고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 행복한 생활을

우리 모두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그 뒤 8월의 어느 날 밤,

 

추억의 흰 목련 유방천추(遺芳千秋)’라는 제목으로

시(詩)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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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극락 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보리.

그 누구에게 구하리.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고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 없이 지고

가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그 후.... 9월의 어느 날 밤에도

그는 한 편의 시(詩)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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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지 모르는지

 

비가와도 바람 불어도

꽃이 피고 꽃이 져도

밤이 가고 낮이 와도

당신은 아는지 모르는지.

 

해가 뜨고 달이 져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당신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고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최영철 의원,

유혁인 정무수석 비서관과 함께

청와대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한 뒤

아내 없는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시(詩)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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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의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 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 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 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박정희 대통령은 아내를 잃은 뒤

일요일이면 즐기던 골프를 한동안 치지 않았다.

9월의 어느 토요일,

그는 두어 시간 동안

서울 근교를 드라이브를 하면서 보냈다.

다음 날도 드라이브를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백일홍’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1974년 9월 30일은 추석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오전에 국립묘지를 찾았다.

그날 밤에도 한 편의 시(詩)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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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소

잘 있었느냐 인사 한마디 없소.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오겠소.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올 테니

그럼 안녕 !

 

1974년 11월의 어느 날의 일이다.

방한(訪韓)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포드 미국 대통령을 환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국립묘지에 들러 아내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아직 비석을 만들지 못해

임시로 목비(木碑)를 꽂아 둔 상태였다.

묘소 주위를 둘러본 뒤,

“임시로 세운 비(碑)지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생전의 지만이 엄마를 연상하게 하는구먼.

애쓰신 분들이 참 고마워.

관리사무실에 들렀다 가지.”

그는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관리실에 들러 그곳 직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세계(世界)에서 제일 가난했던 나라

'大韓民國'

 

1960년대 초반에 서독으로

간호원들과 광부들이 외화벌이에 나가

이국의 현장에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던 시절...

 

박대통령은 나라가 처한 가난을 이겨내고자

외국 여러 나라에 돈을 빌려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지만,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가난과 상황을 볼 때

그 어느 나라도 차관(借款)을

해 주는 나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서독에 파견된

우리 광부들과 간호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비행기를 우리나라에 보내면서

박대통령을 서독으로 초청하였다.

 

박대통령은 1964. 12. 7.  서독 대통령이 보내준

비행기 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여

일주일간의 서독 방문길에 올랐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고,

파견된 광부들과 간호원들은

박대통령 내외 분들을 보고

친부모를 만난 듯 반가움과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박대통령과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회담이 있었고,

뤼브케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신용을 담보로 경제지원 약속을 받았다.

차관 총액 1억 5천 9백만 마르크

(상업차관 1억 5백만 마르크,

재정차관 5천 4백만 마르크).

 

이렇게 빌린 돈으로 박대통령은

치밀한 계획하에 오늘의 大韓民國

이룩한 기초산업을 만들어 나갔다.

 

이와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를

우리는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작금의 현실로 볼 때

우리 대한민국은 더욱 더 세계 속에서

성장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조금 배가 불러졌다고

거만하고 나태함이 있는 국민이 되려는가?

개구리가 되었다고

올챙이 때의 생각을 하지 않는가?

 

지나친 인권 타령이나 하고

복지, 복지만을 주장하며

'먹어조지겠다?'고만 하면 되겠는가?

일하지 않으려들고,

국가의 발전적인 건설은 뒷전으로 한다면

결코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을 것이며,

우리들의 후손들은

세계의 경쟁에서 뒤쳐지고 말 것이다.


특히 서울시의 내년도 복지예산을

들여다보면 한심하다.

주는 거 싫다고 할 시민 하나도 없겠지만...

제 돈이 아니라고 인심쓰는식의

과도한 복지예산으로 경영을 계속한다면...

국가의 발전과 서울시의 발전이 있을런지?

또, 서울시장 박원순은

후세에 어떤 인물로 평가를 받을런지...


선장(船長)이 배를 잘못 몰아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암초(暗礁)에 부딪쳐 배가 전복(顚覆)된다면,

그 배는 어찌 될 것이며

또, 배를 탄 사람들은 어찌 되겠는가?


걱정이 앞설 뿐이다.

지나친 기우일까?

 

[출처]  https://m.cafe.naver.com/hyanggun/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