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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 지난 날의 이야기 9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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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

지난 날의 이야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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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인물로 보는 '한글' 서체의 계보

<탄생 순>



   이원모(? - ?)


   이원모는 우리나라 최초로 한자 명조체를 [한글]에 

   적용하여 ‘동아일보 이원모체’를 디자인하였습니다. 

   1928년에 <동아일보> 활자체 공모에서 당선된 이 

   서체의 자모 조각은 일본의 이와다 자모회사의 

   ‘바바(馬場)’라는 자모 조각가에 의해 손으로 

   조각되었습니다. 


   이원모체는 한자 명조의 성격을 그대로 살려 만든 

   [한글] 활자체로서 신문 전용으로 세로쓰기에 맞도록 

   설계되어 1933년 4월 1일자 <동아일보>의 제목과 

   본문에 처음 등장한 이후에 1950년 6.25전쟁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전쟁 후 북한의 <로동신문>은 이원모체를 바탕으로 

   활자를 제작하였으며, 장봉선도 이를 근거로 서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최정호체로 연결되는 [한글] 명조 활자체 

   계보의 시작이 바로 이원모체였습니다. 



   박경서(? - 1965)


   박경서는 궁체꼴 [한글] 활자를 다듬어 세로짜기 명조 

   활자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한글] 활자꼴의 

   바탕을 마련하였고, [한글]의 네모틀 글자의 세로짜기에 

   글자의 기둥 맞추기 원칙을 확립하였습니다. 

   1936년 이후에 제작된 박경서 4호, 5호 활자는 당시는 

   물론이지만 광복 이후에 국정교과서를 비롯해 많은 인쇄 

   매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신문에 사용된 그의 활자체는 신문의 짜임새를 

   한결 매끄럽게 한 서체 디자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975년경 벤톤 조각기로 만든 최정호 활자가 나타날 

   때까지 박경서가 개발한 자형이 널리 쓰였으며, 

   현재까지도 북한과 연변의 글자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박경서체를 확대하여 최정순과 최정호가 활판용 원도를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공병우(1906 – 1995)


   공병우는 일명 탈네모틀 글자꼴의 모태인 빨래줄 글씨를 

   만든 타자기 발명가입니다. 그는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의 특수성으로 인해 글씨꼴이 기계화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에 가장 먼저 주목한 인물이었습니다.

   [한글]의 기계화가 로마자의 기계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기존의 네모틀에 

   맞추어 일일이 도안을 그려 사진식자기를 사용한 

   인쇄체는 공간 배분이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구성 

   내용이 복잡하여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안으로 세벌체를 내놓았습니다. 


   그의 세벌체 글자꼴인 빨래줄 글씨는 1950년대에 자신이 

   발명한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통해 선보였습니다. 


   이후에 [한글] 타자기와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실제로 

   사용되었고, 일부 신문과 잡지에서 제목체로 

   사용하였습니다. 


   공병우의 빨래줄 글씨꼴은 이후에 젊은 연구가들이 현대 

   감각에 맞게 새롭게 디자인한 샘물체와 안상수체와 같은 

   탈네모꼴 글자꼴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최정호(1916 - 1988)


   


   명조체 : 1950년대-한국의 생활 디자인


[한글] 순명조와 [한글] 명조체


   명조체는 가독성이 높아 [한글] 지면 본문 텍스트용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활자체의 이름을 말합니다. 

   명조체라는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쇄용으로 

   설계해서 그리는 활자체와 손으로 쓰는 글씨체의 

   상관관계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궁서체나 손글씨체, 필기체 등은 붓이나 펜으로 쓴 

   글씨체를 그대로 활자화한 양식들입니다. 


   반면 돌기가 없는 고딕체는 글씨체 특유의 자연스러운 

   손의 흐름을 거의 반영하지 않은 채 설계된 활자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명조체의 성격은 이들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손으로 쓴 글씨체를 기본 골격으로 삼으면서도 

   질서정연한 인쇄체적 설계를 거친 활자체 양식이 

   명조체인 것입니다. 


   명조체라는 이름은 한자의 명조체에서 유래했습니다. 


   한자 명조체는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 차이가 뚜렷하고, 

   수직 수평의 직선성이 강조되었으며, 획의 끝돌기는 세모 

   모양으로 도안되어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한자 명조체의 형태적 특징을 직접적으로 모방한 

   [한글] 활자체를 순명조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같은 인위성은 한국인의 미적 정서나 [한글]의 

   특질에는 다소 이질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보다 보편적으로 쓰이는 [한글] 명조체는 글씨체를 

   바탕으로 인쇄용 성격을 강화해 설계된 활자체라는 

   점에서 한자 명조체의 특징을 수용하면서도 붓글씨다운 

   부드러움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의 활자체와 굳이 비교하자면, [한글] 

   명조체의 조형적 특성은 한자 명조체보다는 한자는 

   해서체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명조체라는 이름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데, 서구식 근대 

   인쇄가 일본을 거쳐 유입되던 당시 본문기본형 활자체의 

   일본식 이름이 그대로 흡수되어 붙은 듯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반적인 [한글] 명조체는 한자의 

   명조체와도 가나문자의 명조체와도 외관의 성격이 

   다른데다 [한글]의 독자적 고유성을 훼손하는 

   이름이라는 우려도 있어, 1992년 문화부는 명조체를 

   ‘바탕체’로 개칭하기도 했습니다. 


   형식면에서 보아도 [한글] 명조체는 한자 명조체의 

   설계된 느낌을 약간 공유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글] 정체 글씨체인 해서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한글] 글자체의 역사로부터 양식적 근거를 찾는다면 

   ‘명조체’ 보다는 ‘해서체’나 ‘정자체’라는 이름이 적절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미 명조체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쓰인 

   상황에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새로운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 하여 개칭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한글] 명조체에 영향을 준 전통인쇄 시대의 글씨체와 활자체들.

좌) [옥원중화연] 연대 미상, 궁체 정자 글씨체,

우) [오륜행실도 언해] 정조 21년(1797년) 간행

 

   한자 명조체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수용한 양식은 

   1930년대 <동아일보>에 사용되었던 이원모 활자체를 

   거쳐 오늘날 [한글] 순명조체에 이른다. 한편, [한글] 

   궁체의 정체를 기본 골격으로 한자 명조체의 설계적 

   성격을 접목한 양식은 18세기 말 오륜행실도 활자체, 

   서구식 인쇄술 도입기의 최지혁 납활자체, 1930년대 

   <조선일보>에 사용되었던 박경서 활자체, 1950년대의 

   최정호 활자체를 거쳐 지금의 [한글] 명조체에 

   이르렀습니다. 


   명조체의 먼 원류라 할 수 있는 궁체는 붓글씨로 글씨를 

   쓰기 위한 필요에 의해 양식화 된 ‘글씨체’로서의 

   정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활자체로서 명조체의 보다 

   가까운 뿌리로는 18세기 말 정조 시대에 주조된 

   ‘오륜행실도 [한글]자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한글] 활자체에 이르면서 명조체 특유의 직접 붓으로 

   쓴 듯 하면서도 정돈된 느낌을 지닌 인쇄용 명조체가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오륜행실도]에서는 한자와 [한글]이 함께 조판되었는데, 

   이때 한자 활자체로는 명조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한자 명조체와 보기 좋게 어울리는 [한글] 활자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한글]이 한자 명조체의 영향을 

   다소나마 받았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영향을 

   수용한 방식은 독자적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한글]이 

   한자뿐 아니라 로마자와 함께 조판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성서를 비롯하여 영어나 프랑스어 

   사전들을 간행한 것입니다. 


   1880년에 만들어진 프랑스어 사전인 [한불자뎐]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가톨릭 신자였던 최지혁의 글씨를 

   토대로 주조한 활자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전에서는 로마자의 로만체, 한자의 명조체, [한글]의 

   해서체가 함께 쓰였습니다. 서구식 근대인쇄가 들어오고 

   소위 신식활자인 ‘해서체 납활자’가 만들어지면서 이제 

   현대 명조체 활자의 기틀이 갖추어졌던 것입니다.

 

   192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신문 본문용으로 사용할 작은 [한글] 활자체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30년대에 <동아일보>에서는 이원모의 

   활자체를, <조선일보>에서는 박경서의 활자체를 

   사용했습니다. 


   이원모체는 순명조체 계열, 박경서체는 명조체 계열의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최정호가 직접 그린 명조체 원도와 그가 글자를 설계하는데 사용한 필기구,

그리고 최정호 명조체의 형태적 특성


   [한글] 명조체의 변천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정표로는, 

   무엇보다도 1950년대 최정호가 모눈종이에 직접 그려서 

   설계한 명조체의 원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원도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서적 및 문서에 쓰이는 

   명조체의 형태적 특성을 확립한 직접적인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박경서 활자체를 연구해서 당시 새로운 기술인 

   사진식자용 명조체 원도를 개발했고, 하나의 활자체를 

   위해 2천 자 이상의 [한글] 원도를 손으로 일일이 

   그렸습니다. 


   이 방대한 작업을 혼자서 모두 소화하다 보니 디테일을 

   보완해야 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그의 

   공헌에 한국인들의 활자 생활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명조체 양식을 따르지만, 조금씩 차이가 나는 여러 [한글] 디지털 활자체들


   바야흐로 디지털 활자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최정호의 원

   도도 그대로 디지털화되었습니다. 


   컴퓨터 툴에 의존하는 디지털 활자체의 한계상 비록 손 

   움직임의 깊은 맛까지 그대로 복원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원본에 충실하게 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윤디자인 연구소, 산돌 커뮤니케이션 등 여러 

   [한글] 서체 개발 회사에서 다양한 명조체를 개발하여 

   선보여 왔습니다. 


   최정호 명조체가 필기의 관습과 직관을 따라 완성된 

   형태미를 지녔다면, 새로 개발된 몇몇 디지털 

   명조체들은 논리와 체계를 부여하여 기능적 측면을 

   강화한 점이 눈에 뜁니다. 


   이에 더불어 명조체를 기본으로 성격적 변화를 준 

   새로운 해석들이 등장한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부드러운 명조체를 기본으로 하되 직선적이고 절도있는 

   획형으로 마감해 남성적 미감을 보여주는 석금호의 

   산돌제비체, [한글] 명조체의 원류인 정조 시대의 

   오륜행실도 [한글] 자체를 직접 디지털화한 해석을 

   담아낸 임진욱의 정조체 등이 그것입니다. 



   최정순(1917 - 2016)


   최정순은 최정호와 함께 [한글] 서체 개발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서체 디자이너입니다. 


   최정호가 출판 활자에 공헌한 바가 크다면 최정순은 

   주로 신문 활자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과서 및 신문 서체를 중심으로 조형성 뿐 아니라 

   가독성에 무게를 두어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 쉬운 

   본문용 서체를 개발하였습니다. 

   1954년에 문교부가 주관한 교과서용 활자체 개량 

   계획에 따라 일본에서 활자서체 설계법과 자모조각 기계 

   조작법을 연수받은 그는 국산 활자기를 생산하여 [한글] 

   교과서 서체를 개발하였고, 1965년부터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서울신문>, <동아일보>, 

   <부산일보> 등 다수의 신문서체를 제작하였습니다. 


   또한 1990년대에 본문 바탕체와 본문 돋움체, 제목 

   돋움체, 옛[한글] 바탕체를 연이어 개발하였습니다. 


   50년 동안 서체 개발 31만 여자의 신문사 서체를 

   수정하고 감수한 것이 90여 만자, 신문사 디스플레이용 

   비트맵에 이르기까지 규모와 수적인 면에서 그를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이상철(1944 - )

   우리나라 최초로 그리드 시스템을 편집디자인에 적용한 

   아트 디렉터인 이상철은 세벌식 서체인 샘물체를 개발한 

   서체 디자이너이기도 합니다. 


   ‘한국 브리태니커 출판사’와 <뿌리깊은 나무>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면서 획기적인 편집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선보이고 과감한 사진 트리밍과 

   그리드 시스템을 도입하였습니다. 


   특히 잡지 <샘이 깊은 물>의 제호를 위해 디자인한 

   ‘샘이 깊은 물체’(일명 샘물체)를 개발하여 활자의 꼴, 

   크기, 자간 행간, 글줄 길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판 

   개념을 독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당시 잡지계의 현실에서 보자면 이는 획기적인 것으로 

   한때 편집디자인 분야에서 이른바 이상철 스타일이 

   대유행할 정도로 그가 미친 영향력은 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로 인해 우리나라 

   편집디자인과 잡지디자인의 역사가 ‘새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헌을 한 그는 이후 

   이가솜씨(현재는 디자인 이가)라는 디자인 컨설팅회사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남홍( ? )


이 남 홍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이지만, 과거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혼불을 밝혀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존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오늘’에 글자를 대입하면 어떨까를 생각해 본 분들은 

   조선일보에서 20여 년간 서체를 만들어 온 이남흥 선생을 

   예로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자신의 고집을 태워 

   글자를 빚고 또 빚어왔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의 서체가 신문서체 가운데 가장 높은 완성도를 

   가진 것으로 평가 받는 이유도 그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지만 모두가 잊고 있던 그 

   이름을 우리 문화에서는 꼭 기억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기성(1946 - )


이 기 성


   최종학위 : 경기대학교 대학원 한글폰트디자인(박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 일본 동경 Training            Course on Book Production 1971년 수료, 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한글정보처리, 석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전산전공),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한글폰트 디자인전공, 공학박사), 신구전문대 부교수

   (겸임교수, 1988 –1992), 도서출판(주)장왕사 상무이사

   (1970 – 1994), 한국 전자출판학회 회장(2003-현), 한국 

   콘텐츠출판학회 회장(2004 – 2005), 한국 사이버출판대학 

   학장(2000 – 2005), 한국출판학회 이사(1994 – 2006), 

   한국 국어정보학회이사(1993 – 2000),


   표 창 : 대통령 표창(제191313호), 국무총리 표창(1992, 

   제59065호), 체신부장관 표창(1989), 인쇄문화 특별상

   (1999, 대한인쇄문화협회), 출판학술상 우수상 수상

   (2001, 한국출판연구소) 저서 : 컴퓨터는 깡통이Ⅰ,Ⅱ

   (1992, 가서원), 전자출판(1988, 영진출판사), DBASE 

   실무강좌(1989, 영진출판사), 사진식자개론(1991, 

   장왕사), 소설 컴퓨터 Ⅰ,Ⅱ,Ⅲ(1993, 성안당), 컴퓨터는 

   내친구(1995, 홍익미디어), 컴퓨터는 깡통이 아니다

   (1997, 청암미디어), 출판개론(2000, 장왕사), e-book과 

   한글폰트(2000, 동일출판사), 전자출판-4(2002, 

   서울출판미디어), 유비쿼터스와 출판(2007, 

   한국학술정보), 한글타이포그래피(2007, 한국학술정보), 

   출판디자인 담론(2008, 장왕사), 타이포그래피와 

   한글디자인(2008, 한국학술정보), 한글디자인 해례와 

   폰트디자인(2009, 한국학술정보) 방송프로그램진행 : 

   컴퓨터는 내친구(교육방송TV,1990-1995), 뚱보강사의 

   컴퓨터 이야기(문화방송라디오, 1994), SBS PC통신

   (서울방송라디 오, 1995), 컴퓨터이야기(위성교육방송, 

   1997) 등의 경력과 더불어 ‘출판저널’에서 취재한 

   내용으로 대신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 정윤희,  사진 : 출판저널>


   이기성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 원장은 “잘못된 

   출판 산업의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소신 

   있는 그리고 출판 근대사와 함께 한 산증인이기도 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 

   원장으로 이기성 계원예술대 명예교수를 임명했습니다. 


   이기성 원장은 장왕사에서 24년 동안 출판현장에서 일해 

   왔고 계원 예술대, 동국대  등에서 출판인들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에는 출판산업 유공자로 대통령상을 받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기성 원장은 직접 만든 폰트

   (믹스 굴림체)로 명패를 제작해 집무책상 위에 놓을만큼 

   글꼴에 대한 깊은 애착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전주 시민이 된 그는 이곳으로 전입시고를 할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인 면을 볼 수 있어서 우리나라 출판계의 

   앞날은 밝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취임에서 밝힌 ‘출판인들 잘 살게 

   해드리겠다’고 말한 것처럼 출판사, 서점, 유통 등 

   출판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잘 사는 구조를 

   만들고 싶은 의욕이 넘치는 것은 “내 인생에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그래서 소신껏 해보려고 한다. 


   원장으로서 출판계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얘기만 들어도 출판인이라면 그 희망은 현실이 될 것은 

   믿어 봅니다.


   그의 출판사 경험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갈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장남이 어딜 가느냐? 가업을 

   이어야지.’ 그 당시 대학교에 들어가니까 데모를 많이 

   했고 수업보다 휴교가 많았던 시절인데, 서울대 입학했을 

   때부터 아버지 회사인 장왕사에 같이 출근을 하면서. 

   1970년부터 1994년까지 장왕사에서 교과서, 단행본 

   기획, 편집, 제작 등 출판 업무를 했던 것입니다. 


   그 후 장왕사에서 24년간 동안 근무한 후 

   계원예술대학에 전자출판과 교수로 임용이 되어 학교로 

   옮겼습니다. 


   학교로 옮겨 갔어도 이틀은 장왕사로 출근해서 회계와 

   세무업무를 담당했었던 것은 그의 넘치는 의욕을 

   여기서도 보게 됩니다.


   그는 원장으로 취임한 후에 출판단체들을 만나 

   ‘출판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물은 결과 

   각 단체별로 예산을 지원해달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 

   전체적으로 예산은 한계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예산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과제를 해결한다면 앞으로 소규모 

   출판사들이 경쟁력을 더 확보할 수 있고, 특히 전자책 

   분야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렇다고 돈을 

   나눠주거나 하는 방식이 아닌 출판사들이 다 같이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단적인 예로 각 서점에서 판매하는 전자책 

   리더기들이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인 것처럼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출판산업의 구조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알고 실천하기로 

   마음을 다지고 있습니다.


   그의 《전자출판론》에 대한 책을 1987년에 처음 

   출판했습니다. 전자출판 관련해서 7권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출판진흥원 홈페이지에 ‘Electronic                    Publishing’이라고 틀리게 써놓은 것을 보고,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진정한 출판인의 기본에 충실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자출판의 영어 표기는 ‘Computer Aided                          Publishing(CAP)’임을 아는 그는 전자출판과 

   전자출판물을 구별해야 함은 전자출판은 행위이고, 

   전자출판물은 결과물이기 때문엔 것을 분명히 아는 그는 

   그런데, 출판인들이 전자출판을 e-Book이라고 알고 

   있음도 지적하고 바로 잡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출판행위가 전통출판에서는 사람 손으로 이루어졌음과 

   즉, 전자출판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종이책도 만들 수 

   있고 전자책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전자책을 만들기 위해서 출판사들은 30만 원씩 

   주고 맡기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적으로 낭비인 것입니다. 


   출판이 IT에 종속 안 문에 전자출판을 위한 에디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그의 소신은 바로 애플에 

   수수료를 내야 하는 잘못된 유통구조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e-Pub은 홈페이지 만드는 소스를 압축시켜 놓은 것이고 

   또 30년 전부터 HTML 소스는 공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래아 한글로 만든 콘텐츠를 e-Pub으로 전자책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국민들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런 구조를 출판진흥원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고 합니다. 


   ‘출판산업 발전과 독서문화 진흥’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풀어내야 하는 게 앞으로 계획임을 아는 그는 

   근본적으로는 부의 공평한 분배가 안됐기 때문임을 

   얘기한 것은, ‘1970년대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졸업자 중 출판사가 가장 높았기 때문에 

   신문기자들이 퇴근 후, 출판사에 와서 교정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최고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이 출판계로 많이 들어와서 

   일을 했지만, 유신 때 출판사들이 문을 많이 닫았고, 

   그때부터 신문사들이 출판사보다 처우 등 근무환경이 

   좋아졌고 또 ’방송 시대‘가 되면서 우수한 인재들이 방송, 

   신문사로 취업을 했던 그 인재들을 현재의 출판사들이 

   급여를 3, 4배 올리면 모든 것이 해결되면 모든 우수한 

   인재들이 출판사들로 몰릴 것이고, 그렇다면 출판 산업은 

   당연히 활성화 될 것은 자명하다는 것을 아는 그는  

   외부환경적인 요인과 내부적으로는 독서진흥을 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출판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책은 재미있어야 하고 또 책을 읽지 않는다고 

   국민들을 탓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책을 만들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또 출판진흥원에서는 재미있는 책을 만들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주는 역할과 우리 민족만큼 콘텐츠가 

   많은 나라임은 바로 우리 역사가 말해 주듯이 오천년 

   역사를 가진 국가다운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출판사로 

   몰려와서 재미있는 책을 만들고, 이런 책을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서 해외로 알려야 한다는 소신 있는 

   출판인입니다. 


   김진평(1949–- 1996)


   김진평은 서체 디자이너보다는 이론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리콤의 전신인 합동통신사에 있으면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 창간을 맡은 이후 그는 

   주로 로고 타입이나 북자켓을 위주로 [한글] 조형 작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실무경험에서 목격한 [한글] 글자꼴에 대한 이론 

   부재에 대해 여러 문제점들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서울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1990년에 <[한글] 활자체 변천의 사적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글] 활자체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후 [한글] 폰트개발, 옛 활자 복원문제를 

   가지고 한성주보 활자체와 김두봉 활자체 연구 등의 

   성과를 남겼습니다. 


   또한 1998년에 서울여대 대학원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타이포그래피의 전공과정을 개설하였습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정립과 [한글] 활자체의 조형성에 

   대한 김진평의 연구는 타계 후 후진들에 의해 재조명하게 

   되었습니다. 저서로는 미진사에서 펴낸 <[한글]의 글자 

   표현>이 있으며, <서울여대 논문집>에 기고한 ‘[한글] 

   타입페이스의 글자 폭에 대한 연구’, ‘[한글] 활자체의 

   조합형 설계 방법에 관한 연구’, ‘한성주보 활자꼴에 대한 

   연구’ 등의 소고를 남겼습니다. 


   추모논문집으로 <[한글] 조형연구>가 있습니다. 



   안상수(1952 - )

   일명 안상수체를 개발한 안상수는 기존의 양식과는 

   차별화 된 서체와 디자인으로 1980년대 [한글] 

   서체디자인과 편집디자인 분야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입니다. 


   안상수는 [한글]꼴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체계적인 연구로 안상수체를 비롯하여 이상체, 미르체, 

   마노체 등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였습니다. 그의 [한글] 

   서체에 대한 관심은 글꼴 개발과 더불어 대중교양지인 

   <마당>과 <멋>의 편집 작업으로 이어졌고 대중잡지의 

   아트디렉션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공헌을 

   하였습니다. 


   계간 <보고서/보고서>의 발행과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전시 활동을 통해 기발한 아이디어와 전위적 

   편집방식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아오고 있는 그는 창작 

   대상으로서 [한글]이 지닌 조형성의 지평을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1983년에 쓴 <[한글] 타이포그라피의 가독성에 

   대한 연구>는 가독성을 중심으로 [한글]꼴을 다룬 최초의 

   연구논문으로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윤영기(1959 - )


   개성이 강한 헤드라인 서체에서 두곽을 나타낸 윤영기는 

   다양한 [한글] 폰트를 개발하여 디자이너들에게 [한글] 

   서체의 선택의 폭을 넓힌 서체 디자이너입니다. 


   1989년에 [한글]서체 개발을 중심 사업으로 한 

   ‘윤디자인연구소’를 설립하여 당시로서는 혁신적으로 

   [한글] 서체를 상품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90년에 제작한 그의 대표작인 윤체는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도 꾸준히 애용되고 있습니다. 이후 참명조체, 

   아이리스체, 회상체, 햇살체 등 수십 종에 이르는 다양한 

   서체를 개발하였습니다. 특히 여름체와 가을체, 봄체, 

   겨울체의 경우 우리나라 서체 중 취약 분야인 필기체를 

   개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서체를 가지고 있는 일본어나 영어에 비해 

   [한글]이 글자 선택과 사용의 폭이 좁았던 당시의 

   현실에서 윤영기는 다양한 표정을 지닌 [한글]꼴을 

   만들어냈습니다. 


   서체 개발 외에도 1996년에 우리나라 서체 문화를 올바로 

   보급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정글>을 

   창간하였고, ‘윤디자인 [한글]서체 공모전’을 실시하여 

   젊은 디자이너들의 [한글]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활동을 

   병행했던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생각을 현실화 시켰다고 

   보면, 그의 안목은 대단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류현국( ? ) 

   오랜 시간 [한글] 납활자를 연구해온 류현국 교수(일본 

   츠쿠바기술대학, 筑波技術大学)가 윤디자인그룹에서 

   지난 해 가을 ‘[한글] 서체의 원형과 계보(1830~1956)’라는 주제에 이어

이번에는 ‘[한글] 서체 원형질문 보편 진격’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류현국 교수는 저서 <[한글] 활자의 탄생(1820~1945)>을 

   통해 근대 [한글] 활자사를 정리한 바 있는데요. 

   이번 세미나에서는 책 내용을 비롯하여 그간 

   국제타이포그라피협회(ATypI)와 각종 해외 강연에서 

   발표했던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갔습니다. 


   ‘국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풍부한 사료(史料)들과 

   함께 일반인들은 미처 몰랐던 근대 [한글] 활자의 

   발전사’를 풀어주었습니다. 


   류 교수는  ‘1970년 제작된 모노타입체의 [한글] 원도’를 

   소개하며 흥미로운 일화를 보탰습니다. 그는 이 원도를 

   확인하기 위해 모노타입사를 방문했었는데요. 

   창고 청소를 겸하는 조건으로 일주일간 머물렀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아예 창고 열쇠를 류 교수에게 맡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한 결과, 마침내 딱 여덟 점 남아 있던 [한글] 

   원도를 발견했습니다. 그때의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그는 술회했습니다. 

류 교수가 발견한 모노타입체 [한글] 원도


   이어 류 교수는 방대한 [한글] 모형활자 중 1883년 11월 

   만들어진 ‘4호 활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제작자의 이름을 따서 ‘이수정체’라고도 불리는 이 활자는 

   1886년 발간된 『한성주보』에 쓰이면서 일명 ‘한성체’로 

   지금껏 알려져왔는데요. 자형 완성도가 높아 국내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활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근대 활자사에 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 ‘한성체’

   보다는 ‘이수정체’로 표기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김상구가 쓰고 편집함. http://wonemind.tistory.com/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