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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고전 서체인‘판본필사체’로 다양한 자형의 감성 표현이 가능한가? - 4 -




‘한글’

고전 서체인‘판본필사체’로

다양한 자형의

감성 표현

가능한가?




- 4 -




[왼쪽부터]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분류두공부시언해, 여씨향약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


중국 원나라 말기의 고승인 몽산의 법어 중 고려 승려 보제존자가 초록한 6편의 법어와 보제존자 자신의 법어 1편을 조선 초기의 고승 신미가 [한글]로 구결을 달고 언해하여 성종 3년(1472년)에 처음 간행한 목판본인 것입니다. 한문 원문 글씨의 아래 중앙에 [한글] 독음을 작은 글씨로 쓰고 국한문을 혼용하여 언해하였으며, 언해를 시작할 때에는 아무 표시 없이 한 칸을 낮추어서 시작하였습니다.   전체적인 자형은 판본고체와 큰 차이는 없으나, 자음과 모음의 기필과 수필 부분에서 한자 해서의 필의가 조금 나타나며, <월인석보>와 같이 가로획과 세로획은 수직과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방점과 아래아(ㆍ) 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자는 행서의 필의가 들어간 유려한 해서이지만 [한글]은 곧은 선으로 딱딱한 느낌입니다.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시를 홍문관의 유윤겸이 언해하여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세종 25년(1443년)에 착수하여 38년 만인 성종 12년(1481년)에 간행된 것으로 전 25권이며, 활자체(금속활자본)로 편찬한 책입니다. '두공부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중국 송나라의 '분문집주두공보시'(分門集注杜工甫詩)를 참고하여 따온 것이며, 흔히 <두시언해>로 통칭하기도 합니다. 

  시문에 능한 학자들이 국역에 참여하여 [한글]로 표현된 유창한 문체와 풍부한 어휘 등이 다른 한시를 능가하는 국어 한시로서 당시의 국어사 및 한시 번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글씨의 모양 곧 서체는 [한글]과 한문의 서체가 유사하며 한시의 원문은 한 줄로 크게 쓰여 정방형으로 안정감이 있지만, 주석문과 언해는 두 줄로 쓰여 작고 긴 장방형으로 글꼴의 차이가 있습니다. 기필과 수필에서 한문 해서의 필의가 보이고 [한글]에는 사성의 방점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


조선 중종 13년(1518년)에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그곳 인심,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송나라 여씨 형제가 만든 <향약>에 주자가 첨삭한 <여씨향약>을 [한글]로만 언해하여 간행한 활자본입니다. 원전을 정확히 익히기 위한 '경서' 언해와는 달리 이해가 쉽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내용에 변화를 주었으며 주도 첨가하였습니다. 또한, 방점, 'ㅿ', 'ㆁ' 등이 모두 나타나는 중세 국어 자료로서, 또한 구결(口訣) 표기의 차자(借字)로서 국어사 연구에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원간본이 지방에서 이루어진 점과 여러 차례 재간행이 되어 정서법과 어휘의 변화 상황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중종반정 이후의 서풍은 사림파들에 의해 송설체에 회의를 느껴 왕희지체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던 때로 연미함보다는 단아하고 탈속한 서풍을 추구하던 때입니다. 자형은 필사체의 형태로 글자의 중심을 오른쪽 서선(書線)에 두면서 자유분방한 장법을 취하였다. 받침 'ㄴ', 'ㄹ'은 마지막 획을 오른쪽으로 길게 하여 안정감을 취하고 있으며, 모음 'ㅓ', 'ㅕ', 'ㅣ' 등에서는 세로획 기울기의 변화를 주어 세로획의 다양함을 느낄 수 있고, 초성의 자음보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길어져 시원스런 자형을 취했으며, 획의 굵기 변화에서 유려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양주 영비각자(楊州 靈裨刻字)


<양주 영비각자>는 현존하는 최초의 [한글]로 쓰인 묘비로 당대 문필이자 명필인 묵재 이문건이 부친인 이윤탁의 묘를 모친인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중종 31년)에 묘 앞에 세운 묘비로 이문건이 직접 찬(撰), 서(書), 각(刻)을 하였습니다. 이 묘비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의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 면에 쓰인 [한글] 경고문인데, 당시 일반 백성의 [한글] 사용의 범위를 알 수 있으며, 이 시기의 [한글] 자료는 언해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짧은 문장이기는 하지만 한문의 번역 표기가 아닌 순 [한글]로만 표현되어 국문학은 물론 [한글] 서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용비어천가> 등 [훈민정음] 반포 직후의 판본고체의 기본을 따르면서 이후 <월인석보>처럼 필사체의 초기 글씨로 가로획과 세로획의 기울기 변화는 크지 않지만, 초성은 작아지고 세로획의 길이가 길어졌고 획의 굵기 변화가 보인다.